언어 철학자인 퀜틴 스키너가 강조했듯이, 정치 언어는 단순한 의견 표현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이며, 제도는 그 행위가 반복되며 유지되는 결과이다(Skinner 1969). 따라서 언어가 변하면, 제도는 필연적으로 그 변화를 따라간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 의회 속기록에는 발언 내용과 함께 괄호 안에 짧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Beifall은 박수, Zurufe는 의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나 고함, Heiterkeit는 웃음이나 조롱 섞인 웃음, Schreien은 고성, Unterbrechungen은 의사진행 방해나 중단을 뜻한다. 이 표현들은 단순한 현장 묘사가 아니다. 의회가 설득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아니면 감정과 적대적 감정이 지배하는 소음의 공간으로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남긴 이 괄호 안의 언어는, 바이마르 공화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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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을 함께 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대별 의회 토론의 특징을 살펴보자. 1919년부터 1921년까지, 공화국 출범 초기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황제 퇴위,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 베르사유 조약 체결이라는 격변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속기록에는 박수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야유나 고성, 발언 방해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정치적 대립은 첨예했지만 의회는 여전히 말로 논쟁하는 공간이었다. 정당성은 폭력이나 위협이 아니라 연설과 반론을 통해 확보된다는 인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패전을 겪은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취약했지만, 정치적 갈등을 언어로 조정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유지되었다.
상황은 1922년과 1923년에 급격히 변한다. 프랑스의 루르 지역 점령,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 그리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독일 사회의 경제적 기반뿐 아니라 정치적 신뢰까지 붕괴시켰다. 중산층의 저축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변했고, 전쟁 패배와 조약 체결을 둘러싼 국민의 분노는 의회를 향했다. 이 시기 속기록에서 야유와 고성이 급증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웃음이나 조롱을 의미하는 Heiterkeit의 증가는 중요한 신호이다. 이는 상대의 주장을 논리로 반박하기보다, 발언 자체를 비웃고 무력화하는 태도가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의회 토론은 점점 논증의 교환이 아니라 감정적 우위와 모욕의 경쟁으로 변해갔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는 흔히 안정기로 불린다. 이 기간 동안 바이마르 의회는 무질서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질서정연했다. 전후 보상체계를 규정한 도스 플랜과 외자 유입, 통화 안정은 경제를 일시적으로 회복시켰고, 의회 속기록에서도 박수는 다시 늘고 고성과 방해는 다소 줄어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질서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강조했듯이, 민주주의는 비판적 담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공론장 위에서만 작동한다(Habermas 1984). 이 시기의 공론장은 작동했지만, 비판의 에너지가 차단된 공론장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공격의 언어가 사라졌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갈등을 말하지 않는 언어는, 다음 위기에서 폭발적 언어의 귀환을 준비한다. 질문하지 않는 의회는 설명할 능력도 잃는다.
1928년 말, 실업률은 다시 오르기 시작하고, 국제 금융은 급격하게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주목해야 할 항목은 조롱(Heiterkeit)의 표현이 속기록에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조롱은 이전 시기에도 존재했지만, 이 시기부터 점점 다른 기능을 갖기 시작한다. 그것은 더 이상 긴장을 완화하는 유머가 아니라, 발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신호로 작동한다. 상대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기는 순간, 논쟁은 종결된다.

1929년은 국제경제사에서 세계 대공황의 시작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량 실업, 복지 재정의 붕괴, 연정 정치의 마비 속에서 대통령 긴급명령이 일상화되며 의회는 통치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의회 속기록을 보면, 이 시기는 언어의 변화가 급격히 침식하기 시작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 괄호 안 반응의 양상은 이전과 질적으로 급변했다. 1929년부터 1932년 말까지 속기록에 나타난 괄호 반응은 총량에서 다시 급증한다. 박수와 야유가 섞이던 패턴은 사라지고, 야유와 웃음, 고성의 연쇄가 반복된다. 웃음은 긴장을 풀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발언의 진지함을 무효화하는 신호로 기능한다. 상대의 말이 더 이상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순간, 토론은 종료된다. 이 변화는 특정 정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산당과 나치당 의원들의 공격적 언어가 가장 눈에 띄지만, 중도 정당의 발언 역시 방어적 단정으로 기울어 간다.
1930년으로 넘어가면, 불신임안 표결을 전후한 논쟁에서 이 언어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1928년 총선까지만 해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불안정하지만 의회 다수 연정이 가능한 상태였다. 사회민주당(SPD), 중앙당, 자유주의 정당들이 느슨하지만 헌정 질서를 지탱하는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 이후 치러진 1930년 9월 총선에서 이 구조가 붕괴되었다. 이 선거에서 나치당(NSDAP)은 득표율 약 18.3%로 급등하며 제2당이 되었고, 공산당(KPD) 역시 의석을 크게 늘렸다. 반면, 중도 정당들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결과, 어떤 조합으로도 안정적 의회 다수를 구성할 수 없는 의회가 만들어졌다. 이 1930년 선거가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극단 정당의 성장이 단순한 불만 표출을 넘어 의회 내부의 상시적 봉쇄 세력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치당과 공산당은 서로를 적대하면서도, 예산안, 정부 법안, 긴급 조치에 대해 동시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의회의 작동을 마비시켰다. 결과적으로 의회 다수에 기반한 내각 구성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정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1930년 9월 선거 이후 이른바 대통령이 직접 행정부 내각을 구성하는 '대통령 내각(Präsidialkabinette)'은 민주주의가 법적으로는 존속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정상 작동을 멈춘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의회를 장악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의회가 더 이상 결정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대통령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국면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불확실성은 경제 위기만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주체가 사라졌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의 불확실성은 정치가 '누가 책임지는가'를 더 이상 명확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심각했다. 유권자는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했지만, 그 의회는 내각을 통제하지 못했고, 내각은 의회에 책임지지 않았다. 정당들은 선거에서 경쟁했지만, 선거 결과는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대통령, 총리, 관료, 정당 사이의 권한 경계는 흐려졌고, 정치적 실패의 책임은 항상 다른 곳으로 전가되었다. 이는 시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무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임명한 브뤼닝 내각(Heinrich Brüning)을 둘러싼 토론에서 야당 의원들은 정책의 효과를 묻기보다, 정부가 국민을 배신하고 있다는 도덕적 틀을 반복한다. 정부 측 답변은 반대로 상대의 책임과 동기를 문제 삼는다. 아래 표에서 보듯, 야유(1,284회), 조롱(642회), 고성(918회), 의사진행 방해(604회)로 이전 시기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속기록에 있는 정부와 야당의 토론 내용을 들여다보면, 논리적 오류들이 자주 발견된다. 인신 공격, 허수아비 공격, 논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레드 헤링, 위기의 책임을 특정 집단에 전가하는 이분법적 구도이다. 논증은 논증으로 반박되지 않고 비난과 공격이 두드러지게 반복되고 있다. 상대의 자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끝나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브뤼닝에 이어 들어선 파펜 내각(Franz von Papen)은 의회 불신임으로 물러나면서 총선거를 선언했지만, 1932년 7월 치러진 총선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즉 히틀러의 나치당은 득표율 약 37.3%를 기록하며 제1당이 되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역사상 단일 정당이 얻은 최대 득표율이었고, 의석 수로는 230석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반에는 한참 못 미쳤고, 의회는 여전히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사회민주당(SPD)은 약 21.6%, 공산당(KPD)은 약 14.3%를 얻어 좌우 극단이 동시에 급성장한 양상이었다. 이 결과는 민주적 합의가 아니라 적대적 다수의 병존을 만들어냈다. 이후 정치 교착이 해소되지 않자 1932년 11월에 재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나치당의 득표율은 약 33.1%로 하락했지만, 여전히 의회 제1당 지위를 유지했다. 사회민주당은 약 20.4%, 공산당은 오히려 약 16.9%로 득표를 늘렸다. 즉 히틀러의 정당은 지지를 일부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내에서 가장 큰 정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동시에 좌우 극단 정당을 합치면 의회 다수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기의 속기록에는 의장의 질서 요청이 이전보다 훨씬 자주 등장한다. 발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끊긴다. 괄호 안에는 소란, 웃음, 고성이 겹겹이 쌓인다. 이때부터 정치적 언어는 이제 더 이상 제도를 지탱하지 못하고, 급격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제도의 무능을 증명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전제 조건으로 지적한 현실 감각의 붕괴, 즉 사실과 의견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확인된다. 사실은 논증의 토대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동원되는 재료가 된다. 1932년과 1933년 기간 동안의 의회 토론을 보면 발언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가 법적으로 폐지되기 이전에 이미 언어의 차원에서 붕괴되었음을 보여준다. 설득은 사라지고, 더 큰 소리와 방해만이 남는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