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로 들어가는 길은 전차와 깃발이 나부끼는 거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속기록의 표지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의회 속기록에는 본회의 회차 번호와 날짜가 찍혀 있고, 발언자의 이름과 당명이 표시되어 있다. 어떤 날은 한 줄의 의사일정이 한 국가의 정치적 상황을 담고 있고, 어떤 날에 기록된 비속어와 공격적 언어가 훗날의 붕괴를 예고한다. 민주주의는 회의장의 공기보다 먼저 문장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기록은 조용히 보여준다.
내가 바이마르 의회를 분석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건을 골라 문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날짜를 고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언어를 비교하려면 한 사람의 연설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의 축적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회의가 열린 날을 연도별로 잠그고, 그날의 핵심 발언을 유형별로 뽑았다. 야당의 질문, 정부의 답변, 당 지도급의 발언, 그리고 절차를 둘러싼 충돌을 함께 읽는다. 하버마스가 공적 정당화의 절차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듯, 의회는 조건과 설명을 요구하고 그 단서들이 충돌하며 공존하는 공간이다(Habermas 1975). 그러므로 분석의 단위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당화의 구조다. 주장과 근거, 증거와 논리의 연결, 반박에 대한 태도, 상대의 시민성 인정 여부가 핵심 변수로 들어간다. 툴민의 논증 모형이 주장과 자료, 그것을 잇는 정당화 장치를 강조하는 이유도, 이러한 제도적 논쟁이 결국 구조로 성패를 가르기 때문이다(Toulmin 1958).

연구 과정은 지리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속기록 하나를 복사해 디지털 번역을 통해 가독성 있는 언어로 다듬었다. 수백 번, 수천 번 이 작업을 반복했다. 그래서 얻은 자료라 더욱 값지다. 바이마르의 첫 장면은 희망에 가깝다. 1919년 여름, 국민의회는 헌정의 언어를 세우는 말로 시작했다. 기록에는 법, 권리, 대표, 책임, 통합 같은 단어들이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문장들은 길고 설명적이며, 상대의 반박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방식이 비교적 자주 보인다. 전쟁 패배와 혁명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는데도, 새 체제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민주주의가 제도로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규칙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이 이 시기의 속기록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그 탄생의 문장들 사이로, 다른 체감의 문장들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정당한 공격이 아니라 낙인, 검증이 아니라 의심, 반박이 아니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아주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예외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쇠퇴는 대개 예외로 시작해 습관으로 변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민주주의 붕괴를 법 조항의 파괴 이전에 규범의 침식으로 설명한 것도 이 지점을 가리킨다(Levitsky and Ziblatt 2018).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말이 줄어들면, 그 빈자리는 곧 정치적 배제의 언어가 채우기 쉽다.
바이마르의 특수성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의 굴욕, 배상 문제, 경제 불안, 거리의 폭력, 혁명과 반혁명의 기억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런 환경에서 정치의 언어는 쉽게 두 방향으로 분기한다. 하나는 설명과 책임의 언어다. 무엇을 할 것인지, 왜 해야 하는지, 어떤 비용이 있는지, 대안은 무엇인지 말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전가와 의심의 언어다. 누가 망쳤는지, 누가 배신했는지, 누가 기생하는지, 누가 내부의 적인지 정해 주는 방식이다. 후자는 짧고 강력하며, 청중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래서 설득 기술만 놓고 보면 오히려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보는 DRHI로 들어가면, 이 언어는 다원적 시민성, 진실에 대한 책임, 갈등 절제, 통합의 규범을 빠르게 손상시킨다. 아렌트가 진실과 현실 감각이 정치에서 붕괴할 때 어떤 종류의 권력이 등장할 수 있는지 경고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전환이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Arendt 1967).
속기록을 읽을 때 나는 문장뿐 아니라 장면을 함께 떠올린다. 발언자는 단상에 서고, 의회 벤치는 의장석으로 각도를 달리해 배치되어 있다. 그 당시 의회 모습을 기록한 동영상을 보면, 어떤 의원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상대 벤치를 똑바로 겨누고 말한다. 어떤 의원은 고개를 들고 천장을 잠깐 바라본 뒤,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며 숫자와 조항을 읽는다. 제스처는 기록에 남지 않지만, 문장의 구조는 남는다. 문장이 짧아지면 대체로 근거가 줄어든다. 단어가 날카로워지면 상대의 정당성이 흔들린다. 반박하는 내용을 담지 않으면 토론은 설득이 아니라 일방적 선언이 된다. 의회 속기록은 무대 연출을 남기지 않지만, 논증의 뼈대를 남긴다. 그 뼈대는 톤과 어조를 상당 부분 복원하게 해준다.

바이마르의 초기에는 이 뼈대가 아직 살아 있었다. 정부를 공격하더라도 정책의 논리적 취약점을 겨누려 하고, 반대하더라도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문장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질문의 형태가 변한다. 질문이 대안을 묻기보다 동기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답변이 책임을 지기보다 상대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동한다. 이때 흔히 나타나는 논리적 습관이 있다. 인신 공격이 정책 논쟁을 대체하고, 무지에 호소하는 말이 증거를 밀어내며, 위협의 논증이 합리적 설득을 대신한다. 허수아비 공격으로 상대의 주장을 단순화한 뒤 쉽게 무너뜨리고, 어떤 집단을 먼저 오염시켜 발언 자체를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만드는 전략도 늘어난다. 이것들은 단지 예절의 문제나 품격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 정당화의 절차를 파괴하는 기술이다.
정치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연구는 엘리트가 던지는 적대적 신호가 대중의 정서적 양극화를 증폭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Iyengar and Westwood 2015). 바이마르의 속기록을 읽으면, 의회는 때로 사회의 분열을 완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분열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했음을 알게 된다. 누가 애국자인지, 누가 배신자인지, 누가 노동자인지, 누가 기생자인지, 누가 진짜 국민인지라는 구분을 의회가 반복적으로 생산하면, 사회는 그 구분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언어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정치언어학이 강조해 온 프레이밍과 담론의 힘은 여기서 구체적 역사로 내려앉는다(Chilton 2004).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바이마르를 연도별로 본다. 1919년의 언어가 헌정의 설계와 정당화에 가까운 문장을 많이 포함한다면, 1920년대 초반으로 갈수록 단어의 온도는 달라진다. 경제와 생존, 배상과 굴욕, 책임 전가와 음모의 어휘가 더 자주 등장한다. 이 변화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 특정 연도의 본회의 날짜를 고정하고, 같은 장르의 토론을 고정한 뒤 단어 빈도와 논증 구조를 비교한다. 예산이나 배상 문제 토론처럼 정책 쟁점이 분명한 장르를 고정하면, 논리적 구조의 약화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질문의 길이가 줄고, 근거의 층이 얇아지고,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거칠어질수록 DRHI의 지표들은 떨어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의 선정이 아니라 반복이다. 반복되는 말버릇은 곧 체제의 습관이 된다.
바이마르는 왜 그 습관을 제어하지 못했는가. 정치학자들이 지적해 온 구조적 원인들이 있다. 헌정 설계의 취약점, 경제 충격, 정당 체계의 분절, 폭력의 일상화, 국제 체제의 압박. 그러나 나는 그 원인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원인들이 언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바뀐 언어가 다시 제도를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이 시리즈의 후반부에 보여줄 것이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언어가 서로를 밀어 올리거나 서로를 끌어내리는 동학으로 움직인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제도가 언어를 절제시키면 민주주의는 버틴다. 반대로 위기가 닥쳤을 때 언어가 헌법과 법률, 그리고 기존 제도를 공격하면 민주주의는 먼저 말에서 무너진다. 바이마르의 비극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늘의 독자에게 바이마르는 과거가 아니다. 낡은 흑백 사진 속의 독일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정치 언어의 미래 가능한 모습이다. 의회가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그것이 검증인지 낙인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답할 때, 우리는 그것이 책임인지 회피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증거가 줄어드는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상대의 시민성이 어디에서부터 훼손되는지, 절제가 어디에서부터 사라지는지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일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속기록의 문장 속에서 매일 존재한다.
다음 글에서는 바이마르의 탄생 언어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위기의 언어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던 시기의 본회의 날짜를 고정해 살펴보려 한다. 짧은 문장이 늘어나는 순간, 책임의 문장이 사라지는 순간, 그리고 상대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는 단어가 늘어나는 순간을, 날짜가 찍힌 속기록의 연쇄로 따라가 보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확인해 보려 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거대한 쿠데타의 순간이 아니라, 매일의 말버릇이 바뀌는 순간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