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황수정 기자] 교과서와 문학소설 속에서만 만나왔던 일제강점기의 예술가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고민을 했을까.
연극 '20세기 건담기建談記'(연출 성기웅)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말기 구보 박태원, 시인 이상 등 당시의 청년 예술가들의 일상을 담아낸다. 이상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조선의 시대상과 암울했던 당시를 살아갔던 예술가들의 내면을 더듬어간다.
연출가 성기웅이 지난 10여년 간 선보이고 있는 '소설가 구보씨의 1일' '깃븐우리절믄날'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 등 구보 박태원과 이상을 다룬 연작. 구보 박태원(이명행)과 시인 이상(안병식), 소설가 김유정(이윤재), 화가 구본웅(김범진)과 수영이(백종승)가 등장해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조심스레 따라간다.
이상이 스스로를 '건담가(建談家, 말로 많이 떠들어대는 사람)'라 칭하며 말재주를 부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로부터 구상된 이 작품은, 구보 박태원과 이상이 만담 커플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작된다.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고, 언어유희를 이어가고, 안무같은 동작으로 역동성을 더한다.
독특한 점은 '말하기쇼' 형식을 차용해 만담부터 악단의 공연, 모놀로그, 라디오 드라마, 변사쇼, 집단 건담 등 다양한 구성으로 꾸며진다는 것이다. 각 장면에 따라 이들의 작품을 소개하거나, 연애사 비하인드를 폭로하거나, 폐병과 치질, 가난 등 현실적 고민을 드러내고, 50년 후를 상상하는 등 폭넒은 서사가 담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이유, 그곳에서 왜 숨을 거두게 됐는지 연극적 상상을 더해 전달한다.
'말하기쇼'답게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말장난이 곳곳에 숨어있고, 가수 지드래곤이나 88서울올림픽, 영화 '괴물' 등이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언급돼 알아차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1930년대 당시 사용되던 옛 서울말과 일본어, 영어 등이 사용되지만 무대 상단의 스크린을 통해 번역된 내용이 제공된다.
또 배우들이 실제로 트럼펫, 하모니카, 아코디언, 심벌즈와 북, 우쿠렐레 등 여러 가지 악기를 직접 연주하면서 청각적 재미를 높인다. 이들은 입으로 화음을 맞춰 때로는 긴장감을, 때로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특히 라디오 드라마의 구성에서는 여자와 남자를 오가는 연기는 물론, 각종 효과음을 눈 앞에서 만들어내 이목을 집중케 한다.
그러나 다소 낯선 언어들과 복잡한 구성은, 잠깐이라도 집중력을 잃으면 쉽게 따라가지 못하게 만든다. 배우들의 독백이나 대화를 통해 추가적인 설명을 하는 친절한 부분도 있지만, 계속되는 장면 전환과 이에 따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전히 헷갈리는 부분들이 존재함은 아쉬울 따름이다.
시인 이상은 물론, 소설가 구보 박태원, 소설가 김유정, 화가 구본웅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었지만, 시대적 비극에 벗어날 수 없었다. 청춘의 아픔은 8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하다. 다만 이 비극을 우리가 어떻게 인지하고 답을 찾아갈 것인지는 각자의 방식에 달려있다. 연극 '20세기 건담기'는 오는 3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된다.
[뉴스핌 Newspim]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사진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