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가스불을 켜 본다. 올라오는 불길에서 불에 대한 느낌이 제법 생기지만 가스렌지에 대해서는 별 느낌이 없다. 그냥 기계일뿐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실에 대해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부엌에 대한 상상이 아궁이로 깊어지자 달라지고 있었다. 음식 요리 면에서 가스렌지와 아궁이는 동격일 것이다. 아궁이의 불 위에도 밥솥이든 냄비든 올려져 음식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궁이에는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배어있는데 반해 가스렌지에선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점이 가슴에 들어온 것이다. 즉 가스렌지엔 아궁이와 다른 점이 분명히 있는데 그에 대해 생각 자체가 없이 살아왔고 그 사실에 마음이 불쑥 간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가스렌지에 대해 무감각에 가까울 정도로 살아왔는데 바로 그것에 대한 성찰이 생겨난 것이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그냥 무감각하게 살면 되지 뭘 신경을 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성찰을 일으켜 따라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보일러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주방의 가스렌지의 불을 끈 나는 방에 들어가 방벽에 달려 있는 보일러 조절 장치에 눈길을 주었다. 사각의 하얀 플라스틱 통 안에 몇 개의 버튼과 숫자, 정보 등이 담겨 있었다. 평소엔 그저 버튼을 누르는 조작만 해왔는데 지금은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이 보일러 조절 장치나 그것에 의해 작동되는 보일러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자각이 일었다. 샤워를 할 때 온수가 나오도록 하거나 겨울에 난방을 위해 보일러를 틀 때마다 스위치를 누를 뿐이지 그 이상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에 속할 것이다. 가스 보일러를 틀기 위해 스위치를 누르면서 누가 보일러에 대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고장이 나면 그때야 어떻게 고칠지 생각을 하던가 기계나 공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가스렌지와 보일러 조절 장치를 연이어 둘러본 나는 조금 전에 떠올렸던 아궁이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갔다. 가스렌지와 보일러의 기능 두 개를 합친 것이 전통 가옥의 아궁이일 것이다.
현대적인 가옥엔 아궁이가 대개 없다. 대신에 저런 기계들로 대체가 된 것이다. 전통 가옥엔 그에 반해 가스렌지나 보일러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아궁이가 생겨나 인류 역사의 오랜 시간을 점유하고 있다.
나는 스물 남짓 이전까지는 아궁이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청주에 있는 집으로 연탄 아궁이였다. 그러나 청주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나오는 시골의 집들은 장작 아궁이가 대부분이었다.
장작 아궁이든 연탄 아궁이든 아궁이는 부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밥을 어디에 짓고 국을 어디에서 끓이고 꽁치를 어떻게 굽는단 말인가. 곤로니 하는 것들이 나와서 그런 일을 처리했지만 그 이전엔 아궁이가 모든 것을 담당했었다.
불이 붙고 머지않아 솥 안의 밥이 익어간다. 냄비 속의 국도 끓는다. 아궁이 속의 불은 고래를 통과해 구들을 달군다. 온돌방이 따듯해진다. 아궁이는 주방 기구인 동시에 난방 기능까지 하는 것이다. 즉 현대가옥에서 주방 기구인 가스렌지와 난방 기구인 보일러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궁이와 그와 연관된 것들에선 모두 불의 냄새가 난다. 아궁이, 고래, 구들, 온돌, 솥, 밥...모두 불의 냄새가 배어 있으며 친근하다. 아궁이와 모두 친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불의 냄새 내지 불의 기운은 아궁이 속으로 들어와 타오르는 장작이나 연탄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궁이로 들어오는 것이나 아궁이, 또한 아궁이와 연결된 것들 모두에 불의 냄새가 나고 불의 기운이 배어 있는 것이다.
“아랫목에 앉아.”
“온돌방이 역시 따듯하고 좋지”
“구들을 잘 놓았어.”
“밥 좀 가져와”
“알았어요. 밥솥에서 얼른 퍼올께요.”
“애들아. 그만 놀고 방에 들어와 밥 먹자.”
어릴 적에 익숙하게 듣던 이야기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불의 기운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궁이 없이 불만 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간 또한 장구했었다. 불을 가두어 불씨를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인지가 생겨 인류의 오랜 선조는 아궁이를 생각해냈다. 그러한 역사성을 지닌 불의 기운은 마음 내지 마음의 세계와도 친연적인 관계라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음과 자연스럽게 조응하며 퍼져나간다.
그렇게 마음과 도구들이 하나인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었다. 그러다가 아궁이가 가스렌지와 보일러로 분화되면서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가스렌지에서 올라오는 불에서 불의 느낌을 그나마 맡은 것 외엔 가스렌지에선 불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성찰의 계기이며 문제의식이었다.
아궁이완 전혀 다른 점이다. 연탄 아궁이보단 장작 아궁이가 더 좋은 사례인데 청주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간 시골에 있는 외가에서 아궁이 안에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바라보며 느껴지는 것이 엄청 많았다. 불과 아궁이가 분리되지 않는 것 같은 감각도 그 일부일 것이다. 비약을 하자면 아궁이 자체가 불인 듯한 느낌도 든다. 좀 풀어서 말을 하자면 불의 정서를 듬뿍 담은 도구가 아궁이다. 물론 불을 때지 않을 때의 아궁이는 썰렁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불이 빠져나간 상태의 고독으로 보여지기에 불과 한몸이라는 내 느낌을 뒤집진 않는다. 그래서 아궁이는 그 앞을 떠난지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불과 한 덩어리인 물건으로 내 가슴에 들어 있는 것이다. 아궁이에 대한 그런 감각 내지 추억은 장구한 인류 역사를 타고 뭇 사람들의 가슴에 은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불의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보일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온돌이나 구들장에서 전해오는 따스한 정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한 단계 넘어서 있는 보일러 조절 장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둘 모두 따스함을 퍼나르는 도구, 컨트롤러일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가스렌지와 보일러에선 차가운 느낌, 분리감이 드니 따스함, 일체감이 담긴 아궁이 내지 아궁이의 문화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인가.
가스렌지나 보일러를 철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 기계들이 삶에 주는 혜택도 풍성하다. 그것들은 과학과 공학이 이루어낸 값진 선물들이다. IT가 발전한 지금은 집 바깥에서 스마트폰으로 집 안의 그런 기계들을 조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삶과 문화, 언어에 불의 기운 즉 자연의 기운이나 마음이 꼭 감겨 있어야만 하는가. 그런 차원과 동떨어져 도시의 냄새가 나고 세련과 첨단의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좋은 일 아닌가.
또한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쉴 시간도 주지 않고 하루 종일 노동 학대에 쪼그리도록 종속시키는 아궁이는 자유와 휴식을 앗는 구속적인 물건 아닌가.
다 좋은 말이다. 과학과 공학, 산업의 발달로 인해 분업화와 분리화가 강화되어 아궁이가 가스렌지와 보일러 등등으로 분화되어 간 것엔 좋은 점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런 문명의 진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일들이 진행될 때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한채 상실되어간 것에 대한 우려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와 함께 그 복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진이 나오자 사진에는 그림에 있는 뭔가가 상실되었다고 보고 벤야민이라는 문학비평가는 그것을 아우라라고 불렀다. 그 작업이 예술적인 차원이라고 본다면 나의 이 작업은 아궁이에 배어 있는 것 즉 인류문화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물론 예술적인 차원도 담겨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더욱 근원적이며 포괄적인 차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림에서 사진으로 넘어갈 때 사라진 아우라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궁이가 분화될 때 사라진 정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잊혀진채 잠복되어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맘만 먹으면 되찾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복원 내지 건설 작업은 기계나 물질 문명의 파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명의 진행과는 별도로 당장 이 순간부터도 창출과 진행이 가능한 것이다. 그 담론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공감이 확장되면 기계나 물질 문명의 구조에 영향을 미쳐 문명의 구조 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는 힘마저 지닐 것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아우라가 되었든 인류문화적인 정서가 되었든 그에 대한 담론이 우리가 사는 삶의 공간 한쪽에 담담히 퍼져 흐른다면 가스렌지나 보일러를 사용할 때도 한결 격조 있는 정감이나 대화가 흐를 것이다. 그런 사소한 행위들이 모여 자칫 기계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수 있는 문화에서 기계를 주도하며 향유하는 문화로 탈바꿈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나 물질에 대한 메타적 담론이 형성되어 삶과 문화가 기름지게 흐르며 표피적인 상술들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균형미를 발휘할 것이다. 나는 나의 이 소박한 작업을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채 상실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서정을 불러 일으켜 그에 대한 서사시적 차원의 담론 형성에 이바지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궁이에서 가스렌지나 보일러로 넘어가기 전에 레일이 있었다. 장작 아궁이에는 있을 필요가 없지만 연탄 아궁이에는 그 바닥에 깔려 있었다. 연탄을 담은 통을 아궁이 저 안쪽 고래를 향해 밀어넣기 위한 것이다.
아궁이 속의 그 레일에서 어릴 적의 나는 왠지 기차가 연상되곤 했는데 산업혁명 이후에 나온 증기기관차나 그것이 달리기 위한 레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 일어난 경제적 혁명의 영향이 동양까지 흘러와 우리 집의 연탄 아궁이 안에도 엇비슷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 이전엔 불이라는 인류 공통의 에너지가 있었다. 그것이 아궁이를 통해 전수되다가 산업혁명 이후 급격한 변화를 동반하며 가스렌지, 보일러, 원격제어 시스템 등으로 대체되고 발전해 나간 것이다. 그 장구한 흐름을 생각하자 내 유년의 집 아궁이 속의 그 구닥다리 레일이 문득 풍요롭고 다층적인 의미로 거듭난다.
기계 문명과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전해 나가는 지금 그 반대급부로 인류가 상실해가는 인류문화적인 내음들. 그 중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궁이와 그에 연관된 구들, 온돌, 밭솥, 음식, 식구 등등에 고루 배인 내음과 정서. 이제라도 그 따듯하고 풍성한 서정을 잘 보듬어 담론화 시켜나간다면 마음과 분리되고 사물 자체로부터도 분리되어 피상성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새로운 대안 문화 기제로 작동되어 삶을 허무와 공허로부터 벗어나 기름지고 윤택하게 할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