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환의 문화의 향기<20>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 종교의 세계
종교는 문화와 매우 밀접하게 관계를 가진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종교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서구사회 특히 유럽문화는 기독교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우리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구분할 때는 통상 서양은 기독교문화권, 동양은 비기독교문화인 불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종교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宗敎)의 한자 의미는 ‘으뜸 되는 가르침’, ‘근본적인 교훈’이라고 풀이된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 즉 현실 이상의 영원한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한편, 종교(Religion)의 영어 어원은 ‘다시 묶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엇을 다시 묶느냐면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묶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래 묶여 있다가 끊어진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묶어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프랑스의 한 심리학자는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사람은 식욕과 번식욕 등 자연적· 생리적인 욕구와 함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제아무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자연히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과연 사후세계가 존재할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인간이 사후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삶이 변화된다. 보다 진지하게 내 삶을 들여다보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본래 목적인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해 슈바이처는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상당히 낭만적인 답변이다. 인간사가 시작된 이후 줄곧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해왔으나 아직껏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영생을 위해 미이라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쳐 보기도 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발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은 가능해졌을지언정 영생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답 찾기를 단념한 인간은 이제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죽은 뒤 천국으로 가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천국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미래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고 지금 당장 천국으로 가겠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그렇다고 답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있다. 목이 타고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기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 길 역시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암흑 속을 더듬어 걸어가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혹은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면서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번민하기도 한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등불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면 그 등불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모태신앙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혹은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인해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대체적으로 가족의 종교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히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은퇴한 남자들이 종교를 찾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자각이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신앙을 찾게 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유로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든 그들은 신앙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을 삭이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종교가 가진 그 어떤 힘이 아닐까? 이처럼 종교는 죽음의 공포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번민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선하게 살아가도록 이끈다.
불교는 명상과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한다. 계율을 지키고, 불도를 실천하고, 명상으로 정신을 깨우고, 깨달음을 완성하면, 스스로 부처가 되고 죽어서는 극락으로 간다고 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명상은 불교에서의 중요한 종교행위가 되겠지만, 사실 명상은 불교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힐링수단이 되고 있다.
또한 불교에서의 주요 가르침은 자비와 관용이다.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관용은 사랑과 용서, 평등을 실천하는 행위라 하겠다. 그런 까닭에 불교는 현실을 직시토록하고, 매사를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차분히 깊게 생각하여 일상생활을 해 나가도록 가르치고 있어, 각자의 실질적인 삶 속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기독교에서의 기본교리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할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실이나 사람에 대한 신뢰라고 되어있다. 종교생활에 있어서의 믿음이란 절대자를 숭배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소망’은 천국을 향한 희망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복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끝으로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종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행위이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이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인 이 ‘사랑’은 현실세계에서도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이철환 하나금융연구소 초빙연구위원·단국대 경제과 겸임교수 ('아름다운 중년, 중년예찬' 저자)
종교는 문화와 매우 밀접하게 관계를 가진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종교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서구사회 특히 유럽문화는 기독교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우리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구분할 때는 통상 서양은 기독교문화권, 동양은 비기독교문화인 불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종교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宗敎)의 한자 의미는 ‘으뜸 되는 가르침’, ‘근본적인 교훈’이라고 풀이된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 즉 현실 이상의 영원한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한편, 종교(Religion)의 영어 어원은 ‘다시 묶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엇을 다시 묶느냐면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묶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래 묶여 있다가 끊어진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묶어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프랑스의 한 심리학자는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사람은 식욕과 번식욕 등 자연적· 생리적인 욕구와 함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 제아무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자연히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과연 사후세계가 존재할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인간이 사후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삶이 변화된다. 보다 진지하게 내 삶을 들여다보고 신의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본래 목적인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해 슈바이처는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상당히 낭만적인 답변이다. 인간사가 시작된 이후 줄곧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해왔으나 아직껏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영생을 위해 미이라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쳐 보기도 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발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은 가능해졌을지언정 영생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답 찾기를 단념한 인간은 이제 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죽은 뒤 천국으로 가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천국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미래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고 지금 당장 천국으로 가겠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그렇다고 답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있다. 목이 타고 외롭고 두려운 가운데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기지만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 길 역시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해 암흑 속을 더듬어 걸어가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혹은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면서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번민하기도 한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등불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면 그 등불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다. 모태신앙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혹은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인해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대체적으로 가족의 종교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히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은퇴한 남자들이 종교를 찾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자각이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신앙을 찾게 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유로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든 그들은 신앙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분노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을 삭이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종교가 가진 그 어떤 힘이 아닐까? 이처럼 종교는 죽음의 공포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번민과 고뇌에서 벗어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선하게 살아가도록 이끈다.
불교는 명상과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한다. 계율을 지키고, 불도를 실천하고, 명상으로 정신을 깨우고, 깨달음을 완성하면, 스스로 부처가 되고 죽어서는 극락으로 간다고 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명상은 불교에서의 중요한 종교행위가 되겠지만, 사실 명상은 불교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힐링수단이 되고 있다.
또한 불교에서의 주요 가르침은 자비와 관용이다.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관용은 사랑과 용서, 평등을 실천하는 행위라 하겠다. 그런 까닭에 불교는 현실을 직시토록하고, 매사를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차분히 깊게 생각하여 일상생활을 해 나가도록 가르치고 있어, 각자의 실질적인 삶 속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기독교에서의 기본교리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할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실이나 사람에 대한 신뢰라고 되어있다. 종교생활에 있어서의 믿음이란 절대자를 숭배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소망’은 천국을 향한 희망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복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끝으로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종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행위이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이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인 이 ‘사랑’은 현실세계에서도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이철환 하나금융연구소 초빙연구위원·단국대 경제과 겸임교수 ('아름다운 중년, 중년예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