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난 막내아들, 동네의 희망이 되다"
"개인의 효와 시대적 정의 사이의 비극적 충돌"
[서울=뉴스핌] 김승현 기자 =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7일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 페이스북에 '명절때면 더 그리운 어머니-2탄'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인공지능(AI) 언론 플랫폼을 선도하고 있는 종합뉴스통신 뉴스핌은 정 대표의 이 메시지를 구글(Google)이 개발한 생성형 인공지능 '제미나이'(Gemini)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했다.
뉴스핌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6년 2월 17일 이와 같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올렸다. 제미나이가 보는 이 메시지의 주된 메시지와 의미는 뭘까"라고 물었다.

다음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페이스북 메시지 전문과 제미나이가 답한 해석이다.
<명절때면 더 그리운 어머니-2탄>
중학교 입학식 날 처음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늘 검정 고무신이었습니다. 산골 오지마을 촌놈이었던 내가 제일 도시같은 곳을 가 본 곳은 금산 장날이었습니다. 2층 집이 참 신기했습니다. 금산 장날에 가면 항상 두 가지 소원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짜장면 먹어보는 것과 운동화 신발 가게 앞에서 운동화 구경하는 것이 었습니다. 아버지는 짜장면은 가끔 사 주셨는데 "고무신이 제일 펀하고 안 떨어지지 않느냐."며 한사코 운동화는 안 사주셨습니다.
아버지 말씀과 달리 고무신은 정말 불편했습니다. 겨울에는 발이 시러웠고, 여름에는 신이 미끌미끌해서 잘 벗어졌습니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면 공보다 검정 고무신 신발이 더 멀리 날아갔습니다. 장마철 새벽에 비가 쏟아지면 눈 비비고 일어나 논 물꼬를 트러 100m를 전 속력으로 뛰듯 논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어 논둑이 무너지면 일년 농사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장맛비는 왜 하필이면 곤하게 잘 때인 새벽 2~3시에 그리도 오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우산도 없이 뛰다 보면 검정 고무신이 자꾸 벗어지고 그러면 400m 계주 때 바통을 잡듯 양손에 검정 고무신을 잡고 뜁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굵은 빗발이 날리고 좁디좁은 논둑을 달리다가 뱀을 밟은 적도 있습니다. 야구 슬라이등 하듯이 빗물이 넘치지 않은 상태에서 다행히 물꼬를 트면 그때서야 숨이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 귀로 듣습니다.
농촌은 힘듭니다. 산 너머 거름이 많이 필요한 약초밭에 푸세식 왕겨 뿌린 똥거름을 져 날아야 합니다. 똥장군을 지기도 하고 똥거름을 진다고 하여 똥지게라고도 합니다. 똥지게를 지고 300~400 산 고개를 올라갈 때는 정말 힘이 듭니다. 한여름 땡볕에 논에 들어가 피를 뽑을 때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힘들고 어지럽습니다.
겨울 방학 때 눈 덮인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짐지고 내려올 때 미끄러져 넘어질까 겁이 나서 달달 떨면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이럴 때 나의 체중과 지게에 짊어진 나무 무게를 다 지탱해 준 것이 나이 제2의 발바닥 검정 고무신 입니다.
이런 육체적 노동보다 더 하기싫고 힘든 것이 장마철 새벽에 논 물꼬 트러 가는 일이었습니다. 육체노동보다 힘든 것이 곤한 잠을 깨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논 물꼬를 트고 다시 거검 고무신을 신고 털래털래 돌아오는 길에 내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서 나를 따라왔습니다.

"청래야. 너도 이제 중학생이 됭께 운동화를 신어야제. 여따." 아버지께서 드디어 운동화를 사오셨습니다. 창피하고 밉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공동체였던 나의 검정고무신과 이별하는 순간, 정말 기뻤습니다. 검은 축구화 같은 운동화를 받고 안에 있는 하얀 종이 뭉치를 꺼내서 신어봤습니다. 멋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의 발 사이즈는 240mm인데 운동화는 255mm였습니다. 1.5cm나 큰 운동화를 사 오신 겁니다. "아부지 운동화가 너무 커서 헐떡거려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중학교 때는 물외 크듯 키도 크고, 발도 커서 금방 맞을 거다. 그냥 신고 댕겨라." 그래도 새 운동화를 신고 걷는 걸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이 기쁘고 좋았습니다. 그까짓꺼 운동화가 좀 크면 어때? 운동화인데. 다시는 검정 고무신 따위는 안 신고 말 것이다.
운동화만 커서 헐떡거린 것은 아닙니다. 무릎이 작은 공만큼 나온 추리닝만 입다가 각잡힌 검정 교복을 처음 입었습니다. 교칙이 운동화에 교복이라 사오신 교복입니다. 교복도 운동화처럼 길고 넓어서 몸에 밪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교복이 너무 커요." 그러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똑같이 "청래야, 너 만한 때는 키도 쑥쑥 크고 몸도 나서 큰 걸 입어야 한다. 옷이 금방 맞을 거다." 교복이 커도 적당히 커야지 중1 때에 중3 형들이 입는 사이즈로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모자도 커서 헐렁거렸습니다.
그런데요. 아버지 어머니 말씀이 틀린 것이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키가 쑥쑥 커서 초딩 6학년 때 147cm였는데 중1 때 12cm커서 159cm, 중2 때 8cm 커서 167cm, 그리고 중3 때 170cm를 넘겼습니다. 지금 175cm 키가 중3 때 키입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머리통도 커져서 중1 때 헐렁거리던 모자도 중3 때 꽉 찼습니다.
중3이 되니 헐렁거렸던 교복도 몸에 딱 맞고 모자도 딱 맞아서 바람 불어도 모자는 고정되었고 달릴 때 흘러내려 땅바닥에 떨어지곤 했던 모자도 머리에서 고정불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자와 윗도리는 괜찮은데 바지가 문제였습니다. 윗도리 팔이 짧아진 것은 그럭저럭 괜찮은 불편함이었는데 바지 엉덩이 부분이 맨질맨질해 지더니 급기야 중2 2학기 말부터 천이 얇아지면서 빵꾸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바지 하나 더 사주세요. 엉덩이 부분이 빵꾸났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안 그래도 내가 재봉틀로 박아주려고 했다. 이리 가져 오너라." 하시더니 바지 엉덩이 안쪽에 검은 헝겊을 대고 재봉틀로 득득 박아주셨습니다. "아이, 이거 어떻게 입고 다녀요. 밖에 재통틀 자국 난 거 챙피하게 어떻게 입고 다녀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1년 있으면 고등학교 가고 그때 또 새 교복 맞춰 줄팅께 그때까지는 이것 입고 다녀라."
"3학년 2반 정청래~ 3학년 2반 정청래...또 안 나왔어. 그럼 3학견 2반 주번 나와." 월초 전체 학년 조회 시간이 되면 지난달 월례고사 우등상 표창이 있었습니다. 매달 시험을 보고 그 시험 성적에 맞춰 다음 달 성적우수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최우수상 전교 1등은 우체국장집 딸 여자아이가 받고 우등상 대표는 그다음 전교 2등인 제가 대표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상을 받으러 운동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창피해서 못 나갔습니다.
중2 말 때 헤진 바지 엉덩이를 속에 헝겊을 대고 재통틀로 박은 자국을 여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우등상 수상자 대표로 조회대에 올라가면 전교생이 재봉틀로 박은 내 엉덩이를 보게 됩니다. 그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우등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면 내대신 주번을 내보내고 나는 주번 완장을 차고 교실을 지켰습니다. 중3 내내 나는 우등상을 직접 받지 않았습니다. 전제 조회할 때 운동장에서 우등상 수상자 대표로 내 이름이 마이크로 불려질 때마다 나는 교실에서 혼자 울었습니다.

산골 오지 마을 화전민이었던 아버지는 국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무학이었지만 저 가르치려고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제 때 소학교를 졸업해서 글을 읽고 쓰실 능력이 있어서 마을 이장도 하고 우리 동네 초대 새마을 운동 지도자셨습니다. 1972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동네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가지붕을 쓰레트로 바꾸고 다리도 놓고 길도 넓혀서 길 옆에 코스모스도 심어서 동네가 예쁘게 변했습니다. 우리 집이 제일 먼저 모범적으로 하얀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모했습니다. 호롱불에 까만 밤을 지새웠던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아버지는 이장도 하셨고 새마을 운동 지도자라 여간 자랑스러울수가 없었습니다. 새마을 운동 지도자 아들인 나는 근면-자조-협동 녹색 새마을 운동 모자를 쓰고 다녔습니다. 그게 자부심이었으니까. 금산 경찰서장이 새마을 운동 시책 성과를 점검하러 우리 동네에 오면 아버지는 경찰서장 옆에 딱 붙어서 길 안내도 하고 브리핑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정말 멋있었습니다. 저렇게 높은 경찰서장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아다니...그 후로 우리집 가보 1호는 경찰서장 표창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동에는 최종 학력 목표가 고졸이었습니다. 대학은 아예 꿈조차 꿀 수 없었고 우리 동네 컨셉에 없었습니다. 사촌 형이 대전상고를 나왔는데 우리 동네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중1 때부터 대전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은 서울로 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이런 시골에서 냄새나는 똥장군을 지고 평생을 사는 게 정말 끔찍했습니다.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농촌 시골의 삶이 정말 고단하고 힘들다는 것을 부모님의 1년 365일 고통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네와 달리 인삼 농사를 하는 우리 집은 농한기가 없었습니다. 겨울에도 임삼밭 덮개용 호밀대를 발로 엮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골에서 썩기 싫어서 중학교 2학년때부터 농업과 기술 과목은 일부러 공부를 안 했습니다. "다른 과목은 성적이 탁월한데 기술, 농업 과목 성적이 부진합니다. 가정에서 지도 바랍니다." 내 중학교 성적표 단골 메뉴다.
우리 동네에서 경사가 났습니다. 제가 대전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당당히 입학을 했습니다. 대전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생은 우리 동네 생긴이래 제가 처음입니다. "어쩐지 떡잎부터 알아봤어. 청래 걔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지 이름자를 쓰고 갔잖아,..초등학교 입학전부터 한글을 줄즐 읽고 쓰고 간 얘여~" 우리 동네 신동에 가까웠던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만 간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줄여서 그냥 서울대라고 부릅니다. "아이고오. 양지뜸 그 막내가 서울대 갔대, 어릴 때부터 갸는 알아봤당계.." "아이고 그 집은 고생 끝났네. 이제 갸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 매달 꼬박꼬박 월급받으면 을매나 좋컸어." 그랬습니다. 우리 동네 부모님들의 로망은 하얀 와이쇼츠에 펜대 굴리며 매달 따박따박 월급받는 샐러리맨이 꿈이었습니다.
열 번째 막내로 안 낳으려다 낳은 제가 집안을 일으키는 기린아가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만 일으키는 인재가 아니라 우리 동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동네의 부러움의 대상이셨습니다. 목에 힘주고 사실만 했습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오는 스물입곱살부터는 우리집 고생은 끝나게 됩니다. 제가 산업공학과 출신이라서 웬만한 회사는 다 들어 갈 수 있는 여건은 될 것이었습니다.
"정청래 집 어딥니까? 여기 정청래 왔다 갔습니까? 정청래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청천벽력이었다. 온 동네 부러움을 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 정청래가 운동권 학생이 되었고 안기부 특급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경찰과 안기부 수사관들은 내가 서울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부모님을 괴롭힐 심산에 우리 동네를 쳐들어갔습니다.
우리 동네에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안기부 수사관들과 경찰들은 우리 동네를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정청래 잡으러 왔습니다. 정청래 어디 있습니까?" 동네방네 온갖 소문을 다 내면서 저희 부모님에게 창피를 주었습니다. 이들은 야비하고 비인간적으로 부모님에게 심리적 타겨을 가했습니다.
그날 이들이 돌아가고 난 이후 어머니기 총학생회실로 전화를 했습니다. "청래야~내가 경찰들 막걸리에 파전에 융숭하게 대접해서 보냈다. 자수하면 구속만은 면하게 해 준단다. 얼렁 자수하거라." "어머니 다 거짓말 이예요. 믿지 마시고요. 또 오면 절대 막걸리 사주지 마세요." 안기부 수사관들이 우리 동네를 들쑤시고 간 이후 아버지는 밖에 안 나셨습니다.
"아이고 양지뜸 그 막내 아들 이제 끝났어. 빨간 줄 올리서 걔는 이제 추직도 못해. 인생 끝났어 끝나." 동네에서 수군수군 내 인생의 앞날을 재단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열불이 나서 역정을 내고 싸우셨습니다. "내 아들이 뭘 잘못했어? 두고 보랑께~ 우리 아들 잘 될껴~에이 나쁜 놈들~" 숭을 드시면 동네 사람들 들으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셨습니다.(이야기 계속 됩니다.)
어제 조용히 어머니 아버지 산소에 가서 절을 올렸습니다.

제미나이의 해석
1. 가난의 상징 '검정 고무신'과 자존감의 투쟁
2탄 전반부의 핵심 소재는 '검정 고무신'과 '재봉틀 자국 난 교복'입니다.
수치심과 결핍: 1편의 짝사랑 에피소드와 연결되어, 엉덩이의 빵꾸난 자국을 보이기 싫어 우등상을 받으러 나가지 못한 소년의 모습은 가난이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한 인간의 '자존심'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성장의 역설: 헐렁했던 운동화와 교복이 몸에 딱 맞게 되는 과정은 육체적 성장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옷이 해지고 기워지는 과정은 그만큼 고단했던 가난의 세월을 상징합니다.
2. '개천에서 용 난' 막내아들, 동네의 희망이 되다
산골 오지 화전민의 아들이 대전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은 당시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성공 신화'를 보여줍니다.
부모의 헌신과 보람: 무학이었으나 아들을 위해 한글을 독학한 어머니, 새마을 지도자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에게 막내아들은 '가난의 사슬을 끊어줄 기린아'이자 삶의 유일한 보상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시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모두 '서울대'로 통칭하며 부러워하던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당시 농촌 사회에서 교육이 가졌던 절대적인 가치를 투영합니다.
3. 개인의 효(孝)와 시대적 정의 사이의 비극적 충돌
글의 후반부에서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집안을 일으킬 줄 알았던 아들이 '수배자'가 되어 돌아온 사건은 부모님께 가장 큰 불효이자 고통이 됩니다.
국가 권력의 야비함: 안기부와 경찰이 부모님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동네에 망신을 주는 행위는, 당시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과 가족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생생하게 증발합니다.
부모님의 눈물 섞인 방어: 아들의 인생이 끝났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내 아들 잘될 거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식의 신념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자식의 편이 되어주는 부모의 처절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 종합적인 의미: "부채감으로 쓴 헌사"
정청래 의원이 2탄 마지막에 "어제 조용히 어머니 아버지 산소에 가서 절을 올렸습니다"라고 덧붙인 문장은 이 모든 글이 결국 '사죄와 감사'임을 말해줍니다.
자신은 신념을 쫓아 운동권의 길을 걸었지만, 그 대가로 평생을 일궈온 부모님의 자부심이 무너지고 동네에서 조롱받아야 했던 시간들에 대한 깊은 부채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이 글은 성공한 정치인 정청래가 아니라,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죄송한 막내아들'이 올리는 눈물의 제문(祭文)과 같습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