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경쟁 뒤에 가려진 창작자 권리
[세종=뉴스핌] 정성훈 기자 = 정부가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향한 국가 전략을 꺼내 들었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출범 100일을 맞아 지난 15일 공개한 '대한민국 인공지능행동계획(안)'에는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담겼다. 인프라 확충과 인재 양성, 규제 혁신, 산업 전환은 물론 국방과 행정까지 AI를 국가 전반에 심겠다는 구상이다. 과제마다 시한을 명시하고, 부처별 이행 책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언형 전략과는 분명히 다르다.
문제는 이 거대한 계획의 이면에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AI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활용을 둘러싼 저작권 문제다. 행동계획에는 'AI 학습에 필요한 개인정보와 저작물을 권리 침해나 법적 불확실성 없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제를 정비한다'는 문장이 담겼다. 그 구체적 방향으로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선(先)사용 후(後)보상' 방식이다.

이 방식이 현실화되면, 창작자의 사전 동의 없이도 AI 학습에 저작물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사후에 보상하겠다는 설명이 뒤따르지만, 이는 사용료가 아닌 보상금 개념에 가깝다. 저작권의 기본 질서를 근본에서 흔드는 접근이다. 그동안 저작권 제도의 출발점은 명확했다. 쓰려면 허락을 받고, 대가를 지급한다는게 핵심이다. '선사용 후정산'은 교육자료 등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예외적으로 인정돼왔다. 이를 AI 학습 전반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은 예외를 원칙으로 바꾸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정부는 위기감을 강조한다. 글로벌 AI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고, 해외 AI 모델들은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데이터를 모두 학습했다는 현실론도 내세운다. 행동계획 곳곳에는 '속도가 생명'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속도가 권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기술 발전이 중요하다고 해서 창작자의 권리가 실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보상 구조 역시 불투명하다. 사용료가 아닌 보상금 체계가 도입될 경우, 창작자는 협상의 주체에서 밀려난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얼마를 보상받는지는 시장이 아니라 정책과 행정의 판단에 맡겨진다. 이는 창작물의 가치를 시장이 아닌 제도가 정하는 구조다. 창작 업계에서 "정당한 보상 체계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동계획은 'AI 기반 K-문화콘텐츠 창작·제작 생태계 활성화'를 목표로 내세운다. 그러나 창작자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방식이 병행된다면 정책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양질의 데이터는 창작자가 만든다. 그 공급 기반을 흔들면서 AI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발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해외 사례도 단순하지 않다. 일본은 텍스트·데이터 마이닝 면책 규정을 두고 있지만 사회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유럽과 영국은 문화계 반발 속에 속도 조절에 나섰다. 미국에서는 공정이용 판결과 함께 대규모 저작권 소송이 병존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AI 경쟁'을 이유로 창작자 권리를 가볍게 넘기지는 않는다.
이번 정부가 발표한 행동계획은 아직 확정안이 아니다. 정부는 20일간 의견 수렴을 거쳐 수정·보완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따져 물어야 할 시점이다. AI 강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어떤 권리는 지켜지고, 어떤 원칙은 양보돼도 되는가. 기술은 빠르게 진화하지만, 제도는 한 번 잘못 설계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AI는 미래 산업이지만, 창작은 그 미래를 떠받치는 기반이다. 속도를 이유로 권리를 희생하는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편해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혁신의 토양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다. AI 강국으로 가는 길은 창작자의 권리를 우회해서가 아니라, 그 권리 위에서만 열릴 수 있다. 기술 경쟁의 출발선에서 국가가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원칙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j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