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독일 연방의회가 17일(현지 시간) 500억 유로(약 86조7000억원) 규모의 군사장비 구매안을 승인한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이날 보도했다.
장병들의 보호 장비 등에 210억 유로, 푸마 보병전투차량에 40억 유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럽 동부 전선에 대한 정찰 능력 강화를 위한 위성시스템 구매 등에 20억 유로를 배정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재무장'을 선언한 독일이 본격적인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 "유럽 내 최강 정규군 만들겠다"
이날 독일 의회가 승인하는 군비 지출은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그리는 큰 그림의 한 조각이다.
FT는 독일 정부의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현 메르츠 정권은 2030년까지 5년 동안 국방비로 총 6500억 유로(약 1127조원)을 지출할 계획"이라며 "이는 이전 5년간 지출한 금액의 두 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전후 80년 가까이 국방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전범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미국이 유럽 안보에 중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FT는 "유럽의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국내총생산(GDP)의 1% 정도만을 국방비로 지출했다"고 말했다.
독일의 각성은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 소속이었던 올라프 숄츠 총리는 전쟁 발발 사흘 뒤 하원 연설에서 "러시아의 침공은 유럽 역사에서 시대전환(Zeitenwende)의 분기점"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군사 개혁을 위해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 기금을 발표했다.
재무장을 향한 독일의 발걸음은 메르츠 시대를 맞아 더욱 가속도를 내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기민당 대표 시절 "내게 절대적 우선순위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화해 국방 문제에서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총선에서 원내 1당을 탈환한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을 주축으로 한 연립정부는 국방비를 대폭 늘리기 위해 부채 브레이크(debt break)라고 불리는 재정준칙을 완화했다.
메르츠는 총리 취임 직후인 지난 5월 14일 하원 연설에서 "독일군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규군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뮌헨연방군대학 메티스연구소의 연구책임자인 프랑크 사우어는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질 것"이라며 "만약 러시아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싸우게 된다면 우리는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재무장 속도전… "적이 국경 넘기 전에 격퇴가 목표"
독일은 무서운 속도로 군비를 확충하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5세대 스텔스 전투기 35대를 도입하기로 계약했고, 유럽의 주력 전투기인 유로파이터 타이푼도 20대를 추가 주문했다.
또 현재 전 세계 방공시스템 중 실전에서 가장 검증된 것으로 평가되는 미국산 패트리엇과 자국의 독일산 IRIS-T 방공 시스템을 추가하기로 했고, 100대 이상의 최신형 레오파르트 2A8 전차와 60대의 치누크 중형 수송 헬리콥터, 다수의 신형 군함과 잠수함, 수십억 유로 상당의 탄약을 주문했다.
또 10억 유로를 들여 최대 1만2000대의 무인 전투기를 구매할 계획이며 이르면 내년부터 납품이 시작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에는 이스라엘에서 도입한 방공시스템 애로우-3가 실전 배치됐다.
독일 군비 조달 담당자들은 현재 독일군이 나토의 전력 공백을 메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으며, 특히 방공 능력뿐 아니라 러시아 영토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정밀 미사일과 같은 공격 능력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무기체계·군수장비·조달정책 등을 총괄하는 독일 국방부의 고위 간부 카르스텐 스타비츠키는 최근 "우리는 궁극적으로 적(러시아)이 국경을 넘기 전에 물리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 정규군 오는 2035년 26만명으로 확충
독일 연정은 지난달 내년 1월부터 만 18세 이상의 모든 독일 남성이 징병 신체 검사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병역제도 개편안을 확정했다.
이를 통해 현역 병력 규모를 지금의 18만2000명에서 오는 2035년까지 26만명으로 늘리고 예비군도 6만명에서 20만명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FT는 "유럽은 미국이 주둔시키고 있는 9만 명의 병력을 계속 유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병력 확대는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 무기 조달 속도가 관건… F-35는 2027년 하반기에 첫 실전 배치
문제는 얼마나 빨리 독일이 무기를 도입·배치하고 병력을 늘릴 수 있느냐이다.
독일의 첫 실전 배치용 F-35 전투기는 2027년 하반기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며, 신형 잠수함은 2030년대 초에 인도될 예정이다.
방산업체 라인메탈과 KNDS가 만드는 레오파르트 2A8 전차는 2030년이 되어서야 납품이 완료될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의 첫 번째 P-8 포세이돈 해상초계기는 주문 후 4년 만인 지난 10월에야 미 보잉사로부터 인도됐다.
200억 유로 규모의 군 통신망 디지털화 사업과 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잠 호위함 건조 계약을 비롯한 여러 주요 조달 사업이 지연과 비용 증가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사우어 연구원은 "독일군은 탱크와 야전포, 보병전투차량 및 기타 재래식 무기도 절실히 필요하다"며 "문제는 각 품목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고 언제 구할 수 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베를린 소재 싱크탱크 에디나의 크리스티안 묄링 소장은 "독일 조달 정책의 핵심 원칙은 2029년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확보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FT는 "독일 정부 관계자들은 2029년이 러시아가 나토 국가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의지를 보일 수 있는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