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이재명 대통령의 전승절 행사 불참으로 남북 정상이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재명 정부가 희망해온 아까운 남북 대화의 자리를 놓친게 아닐까요"
8월 28일 오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세계 주요 헤드라인 뉴스로 타전됐을 때 베이징에 있는 전직 한국 주재 중국 특파원이 기자에게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들어보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남북간 대화는 쉽지않은 일인데, 이재명 대통령이 만약 중국의 전승절 행사 초청을 수락했다면 남북 정상이 자연스럽게 상견례를 할 자리가 따로 마련되지 않았겠냐는 얘기였다.
전승절 기념 대회가 우리 대통령이 참석할만 한 충분한 배경이 있는 행사이고, 이런 행사에 만약 이재명 대통령이 강단있는 결정으로 참석했을 경우 출범 최단기, 역사적인 남북 정상 대화의 자리가 성사됐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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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매년 9월 3일 기념하는 전승절 행사는 당시 미국 영국 등 자유 서방세계와 중국 등 연합국이 주축이 돼 싸운 항일 반파시스트 승전(2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 대회다.
일본은 미국의 핵무기 공격으로 1945년 9월 2일 항복했다. 이날 목발을 짚은 관리가 함상에 올라 문서에 서명했는데, 그가 바로 윤봉길 의사의 수류탄 투척 의거로 하반신 치명상을 입은 일본 외무대신이었다.
적지않은 중국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조선인들의 숭고한 항일 정신으로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연합국에 끼지못한 한국은 비록 전승국에는 들지 못했지만 독립지사들의 항일 투쟁에 있어선 연합국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항일 2차세계 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대회에 우리도 떳떳하게 참석할 수 있는 이유다. 중국의 9.3 전승절 기념식은 10년 주기로 성대하게 열리는데 이미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 참석해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천안문 망루에서 열병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의 전승절 행사 초청에 끝내 응하지 못하고 말았다. 미중 패권 경쟁의 와중에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었겠지만, 향후 5년간 남북 대화 협력을 위해 갈 길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기회 상실이 아닐 수 없다.
고민 끝에 결국 우원식 국회의장이 이 대통령을 대신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지만 우의장의 중국행은 '간 것도 아니고 가지 않은 것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모양새가 됐다. 참석했지만 이렇다할 소득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옹색한 처지만 세상에 부각시키는 꼴이 됐는지 모른다.
더욱이 전승절 행사전 방미길에 오른 이재명 대통령이 "안미경중(安美經中, 미국과 안보를 강화하며 중국과 경제협력을 도모함) 외교를 더이상 유지할 수 없고 미국 중심의 대외 정책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선택적 균형을 부정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이 늘상 강조해온 실용외교의 실체가 뿌리채 흔들리는 상황이 됐다.
베이징의 한반도 전문가는 8월 25일 방미중인 이재명 대통령의 '안미경중 유지곤란' 발언에 대한 뉴스핌 기자의 논평 요구에 "이재명 정부 시대 한중관계는 윤석열 대통령 때 보다는 개선되겠지만 문재인 정부 시대보다는 후퇴 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문제의 '안미경중 유지 곤란' 발언은 '안보도 미국이고, 경제도 미국이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는 윤석열 정부 출범 초 최상목 경제수석의 '탈중국' 발언과도 궤를 같이 하는 얘기로 볼 수도 있다. 설사 미국 정상과의 첫 대면을 고려한 전략적 발언이라고 해도, 자주적으로 실리를 도모해야할 우리 입장에서 볼때 신중치 못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평화의 화신이되라, 내가 그 조력자가 되겠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넨 이재명 대통령의 이 말 역시 그냥 외교적 언사로서 수긍할 순 있어도 마치 한반도 운명을 통째로 내맡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귀에 거슬린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정권,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한반도 운전자론'에 빨간 불이 켜진 듯한 느낌이다.
'무엇때문에 우리의 안전이 달린 운전대를 남에게 내맡기려 하는가'
미중 대치속에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 칠수록 어느때 보다 우리 스스로 주도적인 자세로 한반도 상황을 책임있게 관리해나가야할 텐데 지금 정부는 오히려 우리 운명을 종속적이고 피동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아 걱정된다. 이재명 정부가 이제라도 국익 우선의 실용 외교로 방향을 제대로 잡고 미국, 중국같은 나라들을 상대해 나가야한다.
서울= 최헌규 중국전문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ch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