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일 영웅 양세봉
양세봉은 남한·북한·중국에서 모두 기리는 유일한 항일 영웅이다. 북한은 중국에 있던 양세봉의 묘를 1960년에 평양 근교로 이장했다가, 다시 애국열사릉에 정식으로 모셨다. 1974년에는 남한에서도 현충원에다 양세봉의 허묘를 조성하였다.
남한과 북한의 국립묘지에 각각 안장된 사람은 양세봉이 유일하다. 중국에서는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의 왕청문 마을의 지방정부가 양세봉을 기리기 위해 1995년, 왕청문소학교 교정에다 높이 5.4m의 석상을 세웠다.
흉상 아래의 탑신에는 '항일 명장 양세봉'이라고 적었다. 2005년 학교가 폐교되자, 2009년에 왕청문진 강남촌에 양세봉 기념공원을 만들어 흉상을 옮겼다. 한국인들이 만주 항일유적 탐방 때 빠트리지 않는 참배코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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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양세봉 장군 참배(좌측으로부터 세 번째가 김춘련, 네 번째가 필자).[사진=정연수 박사] 2025.03.10 onemoregive@newspim.com |
1920년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양세봉은 1929년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1931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남만주지역의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1929~1934년 5년간 80여 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 1,000여 명을 처치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조선혁명군은 500여 명으로 조직도 컸다. 양세봉 휘하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했던 계기화(2002년 82세로 작고)는 수기에서 양세봉이 '군신(軍神)'으로 불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34년 중국 마적단과 조선혁명군의 연합을 논의하겠다는 일본의 밀정에게 유인당해 양세봉은 신빈현 소황구에서 순국했다. 양세봉 장군이 죽자 당시 민가에서까지 '큰 별이 떨어졌다'면서 모두가 크게 슬퍼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양세봉은 군부에서뿐만 아니라 3부의 원로중신들이 모인 조선혁명당 안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양 사령은 늘 자기와 김형직은 결의형제라고 하면서 나를 친구의 자식으로 극진하게 사랑해주었다.
길림에서 나를 경제적으로 제일 잘 후원해준 사람이 바로 양세봉이었다."(『세기와 더불어』2권, 조선노동당출판사, 1992, 364~365쪽)라고 평가했다. 양세봉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러주고, 김일성을 화성의숙에 추천해 보낸 바 있다.
김일성은 양세봉에 큰 은공을 입었다고 회고했다.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양세봉에 관한 내용을 23쪽에 달할 정도로 긴 분량으로 등장시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일성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양세봉의 아내(임재순)와 아들(양의준)을 평양으로 불러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극진히 예우했다. 김일성은 회고록 앞장에다 '양세봉 부인을 만나(항일의 여투사들과 함께. 1958. 8)'라는 사진 설명까지 달고,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양세봉의 묘비' 사진도 함께 수록할 정도로 양세봉 장군을 각별하게 예우했다.
양세봉은 김일성에게 "좌익에 섰다는 층이 정치를 잘못하는 탓"이라면서 공산주의자의 과격한 운동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대장(김일성)도 좌익이라니 그런 물계는 잘 알겠지만, 그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내밀기 때문에 인심을 다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꾼들을 폭군으로 만들고,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고… 이렇게 하니까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소닭보듯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세기와 더불어』, 368쪽)라면서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에 김일성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368쪽)라고 성찰했다. 이 대화를 통해 양세봉은 항일 독립투쟁에 나서면서도, 대중의 인심을 잃지 않는 통합의 자세를 신념으로 여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을 발행한 중국 만주족 학자인 차오웬치(曹文奇)는 한국정부가 1962년 양세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수여한 것을 두고 비판한 바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양세봉 장군이라면 1등급(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정부의 외무부장관을 지낸 임병직 같은 인물은 공적도 없이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에 비하면, 양세봉 장군의 업적에 비춰 그 훈격이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양세봉 장군의 직계가 모두 북한에서 거주하다보니, 그 평가가 온전하게 이뤄지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정연수(문학박사, 장소문화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