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양섭 기자] "회사 이름은 언급하시면 안됩니다"
코스닥 기업을 취재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공급하기 시작했는데, 공급처 이름은 기사에 쓰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최근 인터뷰했던 코스닥 기업의 한 대표는 "지금까지 반성문만 다섯번 정도 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공급처 이름을 함부로(?) 얘기했다가, '대표이사가 왜 이렇게 보안의식이 없냐'는 얘기까지 들었다"면서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리곤 굴욕적인 '반성문'도 써야 했다. "내가 그래도 어느정도 규모가 되는 회사 대표인데, 나이 어린 (대기업) 대리나 과장들한테 그런 얘기를 듣는다. 반성문도 자필로 쓰라고 하더라"면서 그는 대기업의 갑질을 지적했다.
어떤 날은 공급처가 갑자기 연휴 직전에 물량을 확 늘려달란 경우도 있었다. 물량이 늘어나 매출이 증가하니 좋을법도 하지만 예정된 생산 스케줄을 벗어나는 건 때론 역효과를 낸다. 직원들은 이미 연휴에 맞춰 상당수가 휴가 계획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선 직원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을 하고 야근도 해야 한다. 고민끝에 그는 '상황상 그 물량은 맞추기 어렵다'고 얘기했더니, 돌아온 반응은 '줘도 못먹느냐'는 핀잔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게 물량을 맞춘다 하더라도 야근, 휴일 수당 등이 더해진 인건비 때문에 원가가 상승하게 된다.
그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면서 스스로 위안했다. 이 회사는 몇년전부터 해외영업을 강화했다. 공급처를 다변화해야 대기업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차라리 해외 기업들과 일하는 게 편하다"면서 "몇년전부터는 해외쪽으로 많이 물량을 돌려놓아서 지금은 그래도 상황이 괜찮아진 편"이라고 말했다.
최근 I사의 임원은 신규사업 아이템으로 추진중인 'OLED 소재' 출하 계획을 언급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관련 내용이 기사로 나간 뒤 '불호령(?)' 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기업 이름이 기사 내용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도 기사를 보고 어떻게 알았는지 대기업으로부터 I사에 컴플레인이 접수됐다. I사측은 'I사가 책임지고 기사를 삭제시키고, 대표이사가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등의 내용이 담긴 요구서를 받아야 했다.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이 참석하는 공개 기업설명회(IR)에서 언급한 내용이 문제가 된 사례도 간혹 있다. 2차전지 배터리 소재를 만드는 E사는 최근 열린 IR에서 대기업 S사를 언급했다가 혼쭐이 났다. S사가 완성차업체에 새로 공급하는 2차전지에 E사가 만든 소재가 들어간다고 언급했던 게 화근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기사 수정 요구에 직접 나서지도 않는다. 언론사와의 마찰은 협력사들의 온전한 몫이다. I사나 E사 같은 경우 대부분 '진행되던 사업이 무산될 수 있다'며 '읍소'하고 대기업 대신 기사에 대한 '수정'을 요청하고 나서는 일이 다반사다.
물론 대기업과 협력사들간 '갑질' 논란은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다. 협력사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대체로 '예전보단 좋아졌다'는 말이 많다는 측면에선 긍정적이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미묘한 '갑질'은 여전한 듯하다.
[뉴스핌 Newspim] 김양섭 기자 (ssup825@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