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고유가·고비용 구조 고착화...기존 투자·채용 계획 수정 불가피
[서울=뉴스핌] 정탁윤 기자 = 중동 전쟁 후폭풍에 유가와 환율이 동시에 치솟으며 국내 대기업들도 비용절감을 통한 '버티기'에 나섰다.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0원을 뚫었고,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훌쩍 넘고 있다.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침체)에 대비해 불필요한 투자와 비용을 줄이는 긴축 경영에 돌입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에도 지난 달부터 임원들의 해외 출장 경비를 축소하는 등 고강도 비용 절감에 나섰다. 현대제철은 전 임원 급여를 20% 삭감하고, 전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비상경영 체제다. SK와 LG는 이사들의 연간 보수 한도를 줄였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촉발한 국내 석유화학업계 위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동 전쟁 직격탄을 맞았다. 석유화학 기업들은 사업 재편 및 나프타분해설비(NCC) 감축과 함께 인력 구조조정도 본격화하고 있다. LG화학과 한화솔루션, SKC 등은 희망퇴직을 통한 선제적 인력 구조조정을 진행중이다.
◆ 기업 체감경기 계엄 이후 최대폭 하락...선제 인력 구조조정 단행
3일 재계에 따르면, 중동 사태 후폭풍에 3월 기업들의 체감 경기는 비제조업 중심으로 악화했다. 4월 경기 전망 역시 비상계엄 사태 여파가 컸던 지난해 초 이후 최대 폭으로 나빠졌다.

한국은행이 3월 기업경기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달 전산업 기업심리지수(CBSI)는 전월보다 0.1포인트(p) 하락한 94.1로 집계됐다. CBSI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가운데 주요 지수(제조업 5개·비제조업 4개)를 바탕으로 산출한 심리 지표다. 과거(2003년 1월∼2025년 12월) 평균(100)을 웃돌면 경제 전반에 대한 기업 심리가 낙관적, 반대로 밑돌면 비관적이라는 뜻이다.
4월 CBSI 전망치는 제조업이 3.0p 하락한 95.9, 비제조업이 5.6p 하락한 91.2로 집계됐다. 이는 계엄 직후였던 지난해 1월 제조업이 3.8p, 비제조업이 9.7p 각각 떨어진 이래 가장 큰 폭의 하락이었다.
기업들은 이같은 경영 불확실성 확대에 선제적 긴축에 나선 상태다. 삼성전자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을 중심으로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이상의 비용 절감 목표를 세웠다. 부사장급 이하 임원의 해외 출장 시 10시간 미만 비행은 이코노미석 이용을 의무화했다. 그동안 임원들은 10시간 미만 비행 시에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해 왔다.
항공유 가격이 중동 전쟁 이전보다 두 배 이상 오르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국내 항공사들은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항공유는 항공사 영업 비용의 20~30%에 달해 수익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또 항공기 리스료·정비비 등 주요 비용을 달러로 지급하는데 1500원이 넘는 고환율에 직격탄을 맞았다. 비행기를 띄울수록 손해란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 반도체·방산 중심 신규 채용...기존 대기업 투자·채용 계획 수정 불가피
대기업들이 투자 축소와 긴축에 나선 배경은 중동 분쟁이 끝나더라도 구조적인 '고비용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위기의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가가 오르면 반도체, 석유화학 등 제조 공정 전반의 생산 원가가 상승한다. 여기에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라 물류비 부담도 한층 증가한 상태다.
재계 한 관계자는 "탄핵과 미국 트럼프 정부 관세 위기를 겪으며 버텨왔는데, 올해 뜻하지 않은 중동 전쟁이 터지며 기업들의 비상경영 체제는 상시적 수준이 됐다"며 "인공지능(AI)과 산업 대전환 시기를 맞아 위기가 아닌 그야말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반도체 '수퍼사이클'(호황기)에 올라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와 조선, 방산업계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채용도 최소화하고 있다. 중동 전쟁 이전만 해도 삼성과 SK 등 주요 대기업들은 대규모 채용 계획을 내놨었는데, 축소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올해만 삼성이 1만2000명, SK 8500명, 한화 5780명, 포스코 3300명, LG 3000명, HD현대가 2000명 이상을 채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그룹도 올해 1만명 이상 채용을 계획하고 있다.
재계는 지난 2월 이재명 대통령과의 간담회에서 5년간 300조원을 국내에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투자 계획 실행에도 빨간불이 커졌다.
삼성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주요 부품사업, 미래 먹거리로 자리 잡은 바이오 산업, 핵심기술로 급부상한 AI 분야 등에 집중해서 채용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수요 급증에 대응해 충북 청주에 19조원을 투자해 첨단 패키징 팹(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선제적으로 긴축과 구조조정에 나선 배경엔 최근 2~3년간 이어진 고금리·고환율·고비용 구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기업이 감당해야 할 '상수'로 점점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반도체와 자동차, 석유화학, 해운 등 사이클 산업을 중심으로 위기가 왔을때 좀 버티면 나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었지만, 이제는 비상경영이 일상이 됐다"고 지적했다.
tack@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