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첨단 메모리 시장 진입 저지…韓 기업 공장 선제 봉쇄
애리조나 투자 중인 TSMC는 전략적 파트너로 예외
韓 기업, 공정 전환 속도...생산 다변화·보조금 해법 절실
[서울=뉴스핌] 서영욱 기자 =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철회 조치로 중국 내 생산 거점 운영에 제약을 받게 됐다. 반면 대만의 TSMC는 전략적 파트너로 분류돼 예외를 인정받으면서 기업 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반도체업계는 한국 기업들이 공정 전환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생산 거점 다변화와 보조금 활용 해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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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사진=블룸버그] |
◆VEU 철회, 삼성·SK 발 묶고 TSMC는 예외
2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VEU는 미국 반도체 장비를 중국 내 외국계 공장에 수출할 때 개별 심사 없이 허용해온 제도다. 지난 2022년 중국 반도체 산업 제재 이후 삼성전자 시안 낸드공장, SK하이닉스 우시 D램공장과 다롄 낸드공장이 대표적인 수혜를 받아왔다.
하지만 미 상무부는 지난달 말 이를 철회하고, 120일의 유예 기간 뒤에는 장비 반입을 건별 심사 방식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증설이나 공정 업그레이드가 어렵게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TSMC는 여전히 영구적인 VEU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TSMC는 중국 난징과 상하이에 주요 생산 거점을 두고 있다.
16nm와 28nm 칩을 생산하는 TSMC의 난징 공장은 해외 공장 중 가장 수익성이 높은 곳이다. TSMC의 지난해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매출 690억 대만 달러(약 3조원), 순이익 260억 대만 달러(약 1조1000억원)를 기록했다. 상하이 공장은 상대적으로 구세대 공정으로 규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TSMC가 제외된 이유는 단순한 기술 수준의 차이에만 있지 않다. 미국 정부는 '전략적 가치'를 고려해 예외를 부여했다는 분석이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최첨단 3나노·2나노 라인을 건설 중이며, 미국 반도체 공급망 전략에서 핵심 파트너로 꼽힌다. 중국 내 공장도 최첨단보다는 성숙공정 위주라 군사적 전용 위험이 낮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최첨단 낸드와 D램 생산 비중이 각각 30~40%에 달한다. 향후 미국이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려면 한국 기업을 제약하는 편이 더 전략적이라고 본 셈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앞서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이번 조치가 "미·중 무역 휴전이 깨질 경우를 대비한 예방적 조치"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자급률을 높여 첨단 메모리 시장에 진입할 경우, 한국 기업의 중국 생산 거점이 중국의 우회적 성장 통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동시에 미국 장비업체의 공급선도 재편해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애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KLA 등 주요 장비사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물량 축소로 타격을 입지만, 전략 차원에서는 감내 가능한 손실로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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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
◆韓 기업 직격탄…중국 공장 레거시화 우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응 전략을 고심하고 있다. 일단 남은 유예 기간 동안 중국 공장의 공정 전환 속도를 끌어올릴 전망이다.
전체 낸드 생산량의 35%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128단(V6) 낸드에서 236단(V8), 286단(V9)으로의 전환을 추진해왔지만, 미국 장비 없이 업그레이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SK하이닉스 역시 우시 D램 팹에서 전체 생산의 35~40%를 담당하고, 다롄 낸드 공장은 전체 낸드의 40~45%를 차지한다. 극자외선(EUV) 장비 도입이 지연되면 계획한 기술 전환이 크게 늦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규제 강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은 장기적으로 레거시화(구형 공정 고착)가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이 두 갈래 선택지에 직면했다고 진단한다. 먼저 중국 내 기존 공장을 '레거시 팹'으로 전환해 유지하고, 최첨단 공정 투자는 한국·미국·동남아 등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미 정부와 협의를 통해 제한적 업그레이드를 허용받는 방식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협상 여지는 크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대응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한국·미국·동남아 등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동시에 중국 투자를 유지할 수 있는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美 빅테크에 부메랑…완화 조치 가능성도
D램과 낸드 등 범용 메모리 생산능력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이번 조치는 중장기적으로 D램과 낸드 생산량 축소 요인으로 작용해 향후 가격 상승을 자극할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최종 수요처 대부분이 미국 빅테크 업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조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미국 기업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앞서 미 상무부는 엔비디아의 H20 수출 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AI 자립도를 높일 것이란 젠슨 황 최고경영자의 우려를 받아들여 중국 수출을 다시 허용한 바 있다"며 "메모리 역시 공급 불안으로 가격이 상승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쪽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에서 향후 엔비디아 H20 사례처럼 완화 조치가 발효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syu@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