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족이 묻힌 중앙고분 3·4호 고분
장식금구·연화문수막새로 조영 시기 가늠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부여 왕릉원의 중앙고분 3·4호의 깊이가 4.5m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국내 현존하는 왕릉 중 최고 깊이의 지하식 구조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원구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임승경)는 25일 오후 2시 부여 왕릉원에서 3·4호분의 구조와 축조과정에 대한 연구 결과를 공개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3일 "2020년 중앙고분군 일대에 대한 시굴조사를 먼저 진행해 3·4호분의 매장시설과 봉분의 위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21년부터 올해까지는 봉분 조사를 실시해 경관복원을 위한 입지 특성과 고분의 구조, 축조과정을 확인했고 조영 시점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자료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부여 왕릉원 전경 [사진=문화재청] 2023.10.23 89hklee@newspim.com |
부여 왕릉원은 백제의 사비 도읍기인 538~660년까지 123년 간 재위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2015년 7월4일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된 이후 2021년 9월17일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현재 명칭으로 변경됐다.
부여 왕릉원 3·4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각각 한 차례씩 조사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당시 도굴갱을 타고 돌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놓인 유물을 수습하고 돌방 내외부 사진과 실측도면을 제시하는데 그쳤다.
고분 조사에서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할 봉분과 돌방의 관계, 봉분 흙의 종류, 조사 당시 주변 지형 등에 대한 면밀한 기록도 없었으며, 1971년 부여 왕릉원 일대에 대대적인 정비 공사까지 진행된 탓에 본래 경관도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부여 왕릉원 4호분 돌방과 봉분의 층위 [사진=문화재청] 2023.10.23 89hklee@newspim.com |
일제강점기 지형도와 발굴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중앙고분군에는 서쪽과 동쪽에 두 개의 능선이 있었다. 3·4호분은 서쪽 능선에 위치하며, 동쪽의 얕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나머지 고분들이 위치하는 형세다.
고분의 구조와 축조과정은 다음과 같다. 고분을 조성할 위치에 돌방의 출입구를 기준점으로 직경 20m 내외의 봉분을 구획한다.
경계지점에 고분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높이 40cm, 너비 25cm 내외의 다음은 돌(호석)을 세우고 그 내부에 봉분을 쌓았다. 이때 호석을 따라 그 바깥으로 1.4m 가량 사이를 두고 깬돌을 열지어 놓았다.
돌방(석재를 쌓아 만든 무덤의 매장시설)은 당시 생활면에서 4.5m 가량을 굴착해 평면 '凸'자 형의 구덩이를 조성했는데 능선 정상부 쪽이 돌방의 뒷벽이고, 경사면 아래쪽이 출입구여서 출입구 쪽으로 갈수록 얕아지는 구조다. 돌방의 높이는 1.3m, 길이는 2.5m, 너비는 1.5m 내외다. 관 매장을 위한 돌방으로 가는 널길의 길이는 10m정도다.
돌방은 잘 다듬은 판석을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봉분은 돌방 천장을 기준으로 3.5m 가량이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하고 출입구에는 판석을 막아두고 널길(무덤 입구서 시신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은 흙으로 채운 뒤 고분 외곽의 호석을 연결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부여 왕릉원 3호분 호석 열 [사진=문화재청] 2023.10.23 89hklee@newspim.com |
국립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조사의 가장 특징은 "완전한 지하에다 돌방을 만든 형태"라며 "당시 생활면 아래 4.5m 구덩이를 팠고, 봉분까지 왕릉의 전체 높이는 12m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백제식 무덤은 신라 왕릉(지상식)과 달리 땅 깊은 곳을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돌로 메우고 그 위로 봉분을 쌓는 지하식 구조"라며 "이번 3·4호분는 국내에서 가장 깊은 지하식 구조의 왕릉"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원에 따르면 중앙 고분과 인접한 동고분과 서고분은 동일한 지하식 구조지만 깊이는 2.5m에 그친다. 연구원 관계자는 "3·4호 고분의 깊이는 동서고분보다 2배정도 깊기 때문에 당시의 공력과 기술이 월등했음을 알 수 있고, 3·4호분이 백제 왕능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해석했다.
3호분과 4호분은 기본 축조과정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 3호분은 돌방 중심을 기준으로 봉분을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쌓았지만 4호분은 수평으로 쌓았다. 또한 3호분에서는 돌방의 출입구에 대형 석재를 덧대고 바닥에 널찍한 석재 2매를 겹쳐 만든 단과 널길의 배수로(너비 60cm, 최대 깊이 100cm) 등이 확인됐지만 4호분에서는 추가 시설이 따로 확인되지 않았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부여 왕릉원 4호분 도굴갱 출토 목관 장식금구(너비 7.2㎝) [사진=문화재청] 2023.10.23 89hklee@newspim.com |
고분을 지은 시점을 알 수 있는 유물도 확보됐다. 4호분에서는 동에 금을 입혀 만든 불꽃형태의 목관 장식금구가 확인됐는데 익산 쌍릉 출토품과 동일한다. 연구원 측은 무왕 시기인 7세기 전반으로 추정했다.
3호분에서는 호석열(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돌을 이용해 만든 시설물)의 석재 사이에서 암키와편, 널길 채움토에서 연화문수막새 조각이 확인됐다. 이 기와들은 모두 인접한 능산리사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고분 조영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연구원 측은 "3호분의 축조시기를 판단할 수 있는 유물은 확보되지 않았지만 4호분보다 축조시기가 조금 이를 것으로 판단한다"고 전했다.
이번 공개 설명회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과가 1500여년 전 부여 왕릉원의 운영될 당시 경관 복원을 위한 중요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생생한 발굴조사 현장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는 적극행정으로 국민의 문화 유산 향유 기회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89hk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