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김장철이 돌아왔다. 전통사회에서 김장과 땔감마련은 서민가계가 겨울을 나기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주요한 살림살이이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24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골장'마을에서 한 할머니가 마을 앞 갯바위에서 바닷물로 김장에 쓸 무를 절이고 있다. 예부터 동해연안 울진지방에서는 배추와 무를 '깨끗한 바닷물에 절여' 김장을 담갔다. 바닷물로 김장을 하면 소금도 아끼고, 무엇보다 "배추숨이 골고루 죽어 김장 맛이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2019.11.24 nulcheon@newspim.com |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긴 겨울을 날 김장과 땔감을 장만하는 일은 농어촌 살림살이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김장은 이듬해 봄까지 온 식구가 먹어야 할 소중한 먹을거리인 까닭에 제 때에 맞춰 김장을 담그지 못하면 그야말로 식구들은 끼니때마다 맨 밥으로 겨울을 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일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촌의 아낙들은 여름에 옮겨 심은 배추가 제대로 속이 들어차는지, 벌레나 들지 않았는지를 살피기 위해 매일 배추밭으로 나가 배추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낸다.
요즘에는 농약 사용이 일상화되었지만, 식구들의 소중한 밑반찬인 김장거리에는 농약을 가능한 한 덜 뿌리는 것이 몸에 익은 농사법이었다.
그렇다고 남정네들도 잠시 쉴 틈이 없다. 겨우내 땔 장작을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사용할 땔감도 중요하지만, 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일 생활비를 한 푼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장작을 패서 내다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 울진지방은 김장담그기로 부산해진다. 김장은 대개 집집마다 날을 잡아 돌아가면서 담갔다.
김장 담그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어서 온 식구가 함께 담그거나 이웃끼리 품을 보탰다. 김장 품앗이인 셈이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24일 경북 울진지방의 낮 기온이 20도를 오르내리며 포근한 날씨를 보이자 죽변면 봉평리 '골장마을'에서 한 할머니가 바닷물에 김장무를 절이고 있다. 2019.11.24 nulcheon@newspim.com |
◆"귀한 소금도 아끼고 맛도 내고"
김장을 담그는 날이면 아침부터 마을 아낙들이 삼삼오오 김장을 담그는 집으로 몰려든다.
최근에 들어서야 소금이 흔해지면서 김장배추는 소금으로 절이지만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해 연안 농어촌에서는 거의 배추를 이거나 지고 바닷가로 나가서 바닷물에 배추를 절였다.
"옛날 김장 때, 그때는 바닷물에 가서 배추를 씻어 왔어. 그때는 소금이 귀해서 소금 아낄라고 그랬는거도 있고, 또 바닷물에 배추로 절이면 맛이 있어. 울진에는 소금 만드는 염전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살래면 값이 비쌌어. 아침에 큰 다라이에 배추 담아 이고 바닷가로 가서 배추로 씼어.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신랑이 지게에 배추를 짊어지고 가지. 그러면 여자들이 배추로 바닷물에 씻어, 대발에 척척 걸쳐서 물을 찌워. 그래 저녘에 집에 이고 와서 김장을 담가."
평생 갯마을에서 살아 온 김춘란 할머니(87)의 얘기다.
배추를 바닷물에 절여 김장을 담그는 일이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30여 년 전 이 땅의 어머니들은 소금 한 줌이라도 아낄 요량으로 찬 가을바람을 맞으며 바닷가로 나가 배추를 절였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김장철을 맞아 경북 울진사람들이 김장담그기로 부산한 가운데 한 할머니가 죽변면 봉평리 골장마을 갯바위에서 김장무를 바닷물에 절이고 있다. 2019.11.24 nulcheon@newspim.com |
배추를 바닷물에 절인 것은 소금이 귀하기도 했지만 '바닷물에 배추를 직접 절이면 배추숨이 골고루 죽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닷물에 절인배추로 담근 김장 한 포기 한 포기 속에는 이처럼 지독한 간난을 이겨 온 우리 어머니들의 지혜가 듬뿍 배어 있는 셈이다.
바닷물에 배추를 절여 집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재우면 소금간이 맞춤하게 들었다.
바닷물에 씻은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아낙들은 김장에 들어갈 '김장속(양념)'을 만든다.
양념을 만들 때는 먼저 찹쌀풀을 쑤고, 여기에 '꽁치간수(젓국물)'와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을 넣고 후린다.
이어 김장소를 만드는데, 울진지방에서는 김장속으로 생선을 많이 넣었다.
영남 내륙지방과는 달리 울진지방은 죽변항과 후포항 등 포구가 발달한 연안지방이어서 싱싱한 생선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장속으로 즐겨 쓰는 생선은 대구, 새치, 힛뜨기, 퉁수, 멸치 따위이다.
이중 대구는 '시원한 맛'을 내는데 일품이며, 새치는 김장 맛을 '고소하고 깊게' 하는 데 일품이었다.
또 살점이 단단하고 기름기가 적어 맛이 졸깃하고 담백한 힛뜨기는 김장속을 비롯 식해(食醢)용으로 선호했다.
식해는 울진지방을 비롯 동해 연안 어촌에서 발달한 염장발효음식으로 토막친 생선에 소금과 무채, 밥을 섞어 발효시킨 음식이다.
경북 울진지방의 전통 음식인 '식해' 용으로 즐겨 사용하는 '힛뜨기' 생선 [사진=남효선 기자] |
◆ 울진 김장김치 특징은 싱싱한 생선 '김장속'...대구, 새치, 힛뜨기,퉁수 선호
김장속은 미리 장만해 놓은 대구나 새치 등 생선에 다진 마늘, 생강, 대파, 당근, 쪽파, 미나리, 청각, 갓 따위를 넣어 버무린다.
바다 나물인 청각을 반드시 넣는데, 이는 시원한 맛을 내기 위해서다.
양념과 김장소가 마련되면 비로소 김장담그기에 들어간다. 바닷물에 절인 배추를 큰 함지에 가득 담아 가운데 놓아두고 한 사람은 한 포기 씩 꺼내 양념을 바르고, 또 한 사람은 양념을 바른 배추에 김장속을 골고루 넣어 잘 여며 놓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미리 잘 씻어 말려놓은 커다란 단지에 먼저 양념한 무를 깔고 그 위에 양념과 속을 넣은 배추를 포개어 놓는다.
또 그 위에 양념을 한 무를 한줄 깔고, 속을 넣은 배추를 포개어 놓는다.
이윽고 한 단지가 가득 차면 맨 위에 양념과 속을 바르지 않은 절인 배추포기를 포개어 놓는데, 이를 "우거지 넣는다"고 한다.
김장 담그기가 끝나면 남정네는 미리 파 놓은 웅덩이에 김장독을 묻는다. 비로소 이듬해 봄철까지 먹을 소중한 김장담그기가 마무리된다.
많은 식구가 한 지붕 아래서 살던 70년대까지만 해도 보통 집집마다 김장독을 3~4개씩 묻었다.
김장담그는 날이면 양념과 김장속을 듬뿍 넣은 겉절이를 안주삼아 아낙들은 막걸리 한잔씩 돌렸다.
김장담그는 집에서 으레 밥은 물론이고,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에서는 돼지고기를 삶아 겉절이를 곁들이며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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