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겨울.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고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그때 그녀와 난 아무 이유 없이 처음으로 헤어졌다. 우리는 대학 4년 내내 그랬다. 헤어지고 나면 아픔이 수습되지 않아 우울하게 한두 학기 견디다가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면 그때마다 그녀는 약속장소로 나와주었다. 빙긋이 서로 웃으며, 새로운 시작을 하곤 했다.
10월 26일 휴교령 이후, 여늬 학생들처럼 나도 기숙사에서 쫒겨나 있었다. 신림동에서 자취를 하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막 배운 당구를 밤늦도록 치기도 했고, 군대로 떠나는 친구 환송 술파티에서 <입영전야>를 함께 목청껏 부르기도 했다.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 창비서적, 러시아 혁명사,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 등을 읽었고, 선배 자취방에서 시대의 불의에 대해 두런거리는 낮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철학과 선배를 만나 막걸리를 푸며 니체나 맑스 얘기를 들으면 철학에 뛰어들고 싶어졌고, 싸르트르나 까뮈를 읽으면 문학을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불쑥불쑥 다가오는 불안감과 막연함, 진정되지 않는 분개심 같은 것들이 가슴을 짓누르곤 했다. 그녀는 내게 먼저 연락을 취하는 적이 없었다. 내 마음을 담은 숱한 편지에도 답장 한 장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를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애틋함을, 어떤 강박이 나를 휘몰아쳐, 자학하듯 부수려 했는지....
그해 12월 어느 날 저녁, 부평의 작은 지하 맥주집에서 우리는 만났다. 술을 안 마시는 그녀를 위해 테이블엔 주스도 놓여 있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정말 보고 싶었고, 그냥 같이 있기만해도 좋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 도사려있는 불안감. 깨끗한 그녀가 왠지 나로 인해 불행해질 것 같은 인정하기 싫은 예감. 정체 모를 벽이 그녀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있다는 막연한 초조가 술 취해가는 나를 엉뚱하게 몰고 갔다. 한마디만 따스하게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었더라도, 나는 이내 기분을 돌이켜 그녀와의 애틋함 속으로 잠겨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랑의 초보였다.
“그럼 끝내자. 헤어지자”
울먹이다시피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오자, 당황한 빛을 띤 그녀가 다급하게 내 뒤를 따라나섰다.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부평역 부근 담벼락 옆, 눈이 수북히 쌓인 공터에도 하얀 눈발이 퍼붓고 있었다. 시베리아 같다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손을 쥐어 내 바바리 주머니에 넣어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널 만나는 것이 어쩐지 숙명처럼 느껴졌어. 그리고 그 숙명이란 것이 난 두려웠어”
그런 말도 그녀는 내게 했고, 사실 우리 사이에 화해의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에 휩싸여 나는 불화의 길을 고수하고 있었는지....다음엔 자기가 청주에서 날 기다릴 차례라고도 했는데, 그 말 역시 무심 속에 묻어두었다. 함박눈은 계속 내리고, 우리가 꼭 붙어 걷는 발길엔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아련함 속에 자박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비틀거리며 오래 걸었다.
그녀는 자기 집에 바래다 달라고 했다. 이런 말 할 줄 모르는 인색한 여자가 내 마음을 감동케 하는 말을 눈물 나도록 자꾸 던지고 있었다. 그녀의 집 앞. 나보고 먼저 가라는 그녀를 기어코 우겨 집에 들여보내고 뒤돌아 나선 길, 모든 것이 달라 있었다. 그녀의 집 담 곁, 눈이 펑펑 쏟아지는 극치의 아름다움 속에, 허무의 진공이 확 뚫려 있었다. 쓰러질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몇십 미터 걸었을 때, 가로등이 서 있었다. 그 불빛을 받으며 무수한 꿀벌의 윙윙 소리처럼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발. 가로등 조명 아래, 전신주에 무너질듯 기대 마냥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