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연 문화 기획자(문화유목민 대표)
도시는 언제나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떤 곳은 중심이 되고, 어떤 곳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 선택은 대개 권력과 자본, 정책의 흐름에 의해 이루어지며, 도시는 그 결정의 결과를 오랫동안 견뎌낸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은 고착된 상태가 아니다. 시간이 축적되면 중심은 무거워지고, 시간이 비워지면 주변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문화는 언제나 이 틈새에서 방향을 바꾼다.
이번에 출장 차 방문한 마드리드의 '카라반첼(Carabanchel)'과 포르투의 '미구엘 봄바르다(Miguel Bombarda)'이 두 장소는 서로 다른 역사와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문화 중심지가 생성되고 소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외곽도시인 카라반첼은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은 공간'이었다.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생산공장의 기능을 수행하던 장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저 '지나치는 곳'으로 남았던 지역이다.
이번 방문에서 만난 작가 '루벤 마틴 드 루카스(Rubén Martín de Lucas)'는 카라반첼의 이러한 변화를 몸소 증명하는 존재였다. 그는 이곳이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예술가들에게 어떤 자유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에게 카라반첼은 거창한 전시 계획이나 브랜드 전략 이전에, 작가의 작업과 생활이 천천히 스며들 수 있는 '공백'의 공간이었다. 루벤과 같은 이들이 조심스럽게 일구어가는 리듬은 카라반첼의 시간을 조금씩 두껍게 만든다. 완결된 답보다 과정과 실패를 허용하는 태도, 시장보다 실험을 우선하는 태도가 이곳의 시간을 축적시키고 있었다.


반면, 포루투칼의 제 2의 도시 포루투의 미구엘 봄바르다는 다른 시간 위에 서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포르투를 대표하는 문화의 얼굴이었고, 사람들은 이 거리를 통해 도시의 예술적 정체성을 이해해 왔다.
전시와 방문, 소비와 이동이 명확한 리듬을 이루던 장소였다. 그러나 중심은 오래 지속될수록 자신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진다. 기대가 쌓이고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공간은 점점 예측 가능한 표정만을 갖게 된다.
포르투에서 만난 한국을 사랑하는 갤러리스트 '파비앙(Fabian)'의 이야기는 이러한 변화의 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최근 미구엘 봄바르다 일대에 에어비앤비를 중심으로 한 숙박 공간이 급증하며, 주거와 예술적 활력이 어떻게 잠식되고 있는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전했다.
전시는 여전히 열리지만, 그 전시를 지탱하던 생활의 리듬과 작업의 시간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공간은 여전히 '문화 지구'로 불리지만, 그 안에서 축적되던 밀도는 관광의 논리에 밀려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구엘 봄바르다는 사라진 장소가 아니다. 다만 그곳의 시간은 이미 충분히 사용되었을 뿐이다. 문화가 작동하던 구조는 남아 있지만, 그 구조를 움직이던 날카로운 감각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다. 파비앙이 감지한 그 변화의 조짐은 중심의 쇠퇴가 실패가 아니라 하나의 역할을 다해가고 있는 시간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동은 특정 도시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뉴욕에서 유사한 시간의 변화를 목격해 왔다. 한때 예술가들은 낮은 임대료와 열린 구조를 찾아 소호로 모여들었다. 공장의 기둥과 높은 천장은 작업의 호흡을 지탱했고, 전시는 생활과 분리되지 않은 채 축적되었다.
그러나 밀도가 높아질수록 공간은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작업실은 쇼윈도가 되었고, 머무름의 시간은 이동의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예술가들이 떠난 자리에는 브랜드가 들어왔고, 소호는 생산의 장소에서 재현의 장소로 전환되었다. 이후 중심은 첼시로 이동했으며, 최근 브루클린의 부시윅 (Bushwick, Brooklyn)과 퀸즈의 리지우드(Ridgewood, Queens)에서는 속도가 늦춰진 다른 시간의 호흡이 감지된다.
이렇듯 이와 같은 흐름은 뉴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관광 산업의 확장과 도시의 팽창은 모든 대도시에서 유사한 변화를 촉발하며, 체류의 시간을 압축하고 공간을 경험의 장소가 아닌 소비의 동선으로 재편한다. 그 결과 도시는 중심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 이동의 속도에 따라 문화가 머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끊임없이 재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카라반첼과 봄바르디아, 이 두 지역을 나란히 놓고 보면, 문화의 부흥과 쇠퇴는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부흥은 공백에서 시작되고, 쇠퇴는 과잉에서 시작된다. 문화 중심지는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밀도가 증발하고 다시 맺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카라반첼에는 루벤이 말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시간'이 있고, 미구엘 봄바르다에는 파비앙이 목격한 '이미 충분히 설명된 시간'이 있다. 하나는 이제 막 축적되기 시작한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모된 시간이다. 문화는 늘 더 많은 빛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덜 말해진 공간, 덜 규정된 장소를 선택해 다시 숨을 고른다.
도시가 쇠퇴한다는 것은 건물이 낡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리듬이 끊어지고, 공간과 감정의 연결이 느슨해질 때 도시는 비로소 지친다. 따라서 문화정책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중심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지를 정확히 감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과도한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중심은 언젠가 반드시 가벼워지고, 주변은 어느 순간 숨을 되찾는다. 문화는 그 이동의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이며, 도시는 그 감각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따라 다음 역할을 얻게 된다. 문화는 장소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호흡이 가능한 시간을 조용히 선택할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도시들에는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는 가. 카라반첼과 미구엘 봄바르다의 사례는 우리 도시들에게 시급한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수많은 '문화 지구'가 만들어졌지만, 그 공간들이 예술가의 호흡을 담는 '축적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아니면 자본의 속도에 떠밀린 '소비의 시간'으로 직행하고 있지는 않은 지 한번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수동이나 을지로 같은 원도심 현장들은 이미 미구엘 봄바르다보다 가파르게 '소모된 시간'에 도달했거나, 카라반첼처럼 남겨진 '공백'마저 과도한 행정적 개입으로 채우려 든다. 부흥을 위해 투입된 자본이 오히려 장소의 밀도를 증발시키고 예술가의 리듬을 얇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때론 염려스러울 때도 있다.

도시의 부흥은 랜드마크가 아니라, 그곳을 점유한 이들이 실패하고 실험할 수 있는 '밀도의 여유'를 허락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중심의 선언이 아니라, 어느 골목에 아직 '숨 쉬는 시간'이 남아 있는지를 감지하는 일이다.
문화는 구획된 개발의 논리 속에서 배치되는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인간의 체온이 머물며 축적되는 '살아 있는 시간'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시가 다음의 역할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장소에 강요해 온 속도의 압박을 거두고, 그 공간이 감당해야 할 시간의 밀도와 무게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전혜연은 여성인권·미디어아트·도시교류를 통해 예술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만드는 행동하는 큐레이터다. 2014년 글렌데일 '위안부의 날 특별전'을 시작으로 소녀상 지키기 국제 연대전을 이끌었고, 2017년부터 글렌데일시 공식 행사로 승격, 8개국 100여 명 작가가 참여했다. 국내에선 《여성인권이야기: 행진》을 성북, 부산, 보은, 고성, 포항, 인천, 김포, 파주 등 지방정부와 함께 이어가고 있다. 2018 평창올림픽 미디어아트 기획을 계기로 공공 미디어아트의 사회적 소통 가능성을 열었고, 수원문화축전·국립극장 등에서 지역 역사와 장소성을 담은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김포-글렌데일 교류전은 '경계'와 '자유'를 주제로 일상 공간에 공공미술을 설치했으며, 2024년에는 김포의 지역 의제를 다룬 '다양성'이란 전시로 네 지역을 아우르는 28명 작가 참여한 대규모 미디어아트전도 기획했다. 최근에는 사이버불링을 여성인권 의제로 삼아 국회 논의·전시·온라인 캠페인을 준비 중이다. 그는 예술이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 대안과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 국제예술생태연구협회 대표, 귀주사범대 동아시아미디어센터 책임연구원, 비영리 단체 문화유목민 대표, 전시 기획사 SR Comm 대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