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황수정 기자] 배우들이 명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품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천천히 극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조금씩 느끼게 된다.
극단 프랑코포니가 창단 10주년을 맞이해 연극 '아홉소녀들 Neuf Petites Filles'을 선보이고 있다. 9명의 소녀들이 '놀이'를 통해 페미니즘, 성폭력, 차별, 비만, 소외, 왕따, 동성애, 이주민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으로, 프랑스 극작가 상드린느 로쉬(Sandrine Roche)의 희곡을 까띠 라팽(Cathy Rapin)이 연출했다.
작품은 9명의 배우들이 정장을 입고 등장해 음악에 맞춰 빨간 넥타이와 운동화, 치마로 갈아입으면서 시작한다. 좌우로 나뉘어 대기하는 배우들은 적게는 2명, 많게는 9명 모두 무대 가운데로 나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조잔디가 깔리고 네모난 소품 2개, 사다리가 있는 간소한 무대에서 이들은 이야기짓기 놀이를 시작한다.
무대 위 배우들은 몇 살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어른이 아닌 아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진실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고, 거기에 경험과 상상력을 더한 이야기들을 흡사 자신의 일인마냥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사실은 조금 소름끼친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만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원피스 입고 벌써 세 번이나 강간당했어" "너희들 여기 사람이 아니잖아" "여자는 골칫덩어리" 등. 순진무구하기에 더욱 잔인하게 들리는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편견이 적나라하게 담긴다. 아이들 앞에서는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 어른들의 폭력적, 편향적인 언행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스며드는 모습을 통해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독특한 점은, 아홉 '소녀'들이지만 남자 배우 3명이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빨간 치마를 입는다. 여성스러운 말투나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명의 '소녀'로서 함께 한다. 이에 대해 연출 까티 라팽은 "여자와 남자를 분리시켜 따로 이야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여자의 고통이 남자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음 다 연결된다. 오히려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총 23장의 독립된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다양한 주제가 언급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보편성을 가지고 우리의 공감대를 자아낸다. 프랑스 원작이지만 성별 구분 없이, 나이 구분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상황과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 너무나 익숙해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주제를, 익명의 캐릭터와 이야기짓기 놀이라는 독특한 구성으로 관객들에게 새롭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연극 '아홉소녀들'은 오는 4월 8일까지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2관에서 공연된다. 또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초청으로 극작가 상드린느 로쉬가 방한해 오는 관객과의 대화, 연극 워크샵도 진행한다.
[뉴스핌 Newspim]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사진 극단 프랑코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