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지하철을 빠져나오며 하늘을 올려보는 순간 아찔했다. 너무도 청명해서였을까. 저곳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던 기억이 시간의 두터운 껍질을 깨고 불현듯 되살아나서였다.
대여섯 살 때인 것 같다. 청주의 집 마루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볼 때 나는 갑자기 너무도 무서웠다. 저곳으로 떨어져버릴 것 같은 공포가 짜릿 몸 속으로 스민 것이다. 나는 떨어져 내리지 않기 위해 마루의 끝을 거머쥐었다. 그때의 손의 촉감이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젖먹던 힘까지 주어 꽉 쥐었음에도 곤두박질칠 내 몸의 무게로 인해 스르르 풀려 버릴 것 같은 낭패감이 손아귀에서 허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만유인력이나 중력에 대해 배우기는커녕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모르던 나이였다. 지구의 중심이 나를 끌어당기기에 지구를 떠나 허공에 둥둥 날려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터무니 없는 망상이라는 관념이 들어서지 않았다. 내 마음은 천연의 무지 상태였고 백지였다. 그냥 하늘이 무서웠다. 그 순간엔 하늘이 위에 있지 않고 저 아래에 있었다. 까마득한 저 밑에서 파란 심연의 아가리를 벌리고 내가 떨어져 내리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집은 비어서 나 혼자였고 나는 마루에서 저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듯한 공포 속에서 쥐어봤자 헛된 마루 끝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거머쥔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서 꿈이었던 시인이 되고 상상력에 대해 공부할 때 상상력 즉 이메지네이션(Imagination)을 일본어로 직통(直通)으로 번역하기도 한다는 말을 책에서 보았을 때 내게 떠오른 것이 바로 저 공포였다.
직통(直通) 즉 바로 통하는 것. 간접적인 우회나 경로 없이 본질이나 느낌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 하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공포는 나로선 직통의 중요한 사례인 것 같다. 그 공포. 아찔함. 그 안엔 실로 엄청난 보고가 담겨 있다. 자연에 대해 순진했던 원시인들이 자연을 대할 때 그 비슷한 생경함이 일었을 것 같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도 저것과 비슷한 체험이나 상상이 마음을 채운 시간이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낯설게 보였는지도.
상상력을 보통 무에서 유를 창조하거나 꾸미거나 덧씌우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마법의 빗자루가 하늘을 날고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서 지니가 튀어나와 주문이란 주문은 다 들어주는 일도 그 근원을 파고 들면 깊은 곳에 다다르지만 그런 면도 다분하다. 산해경엔 별의별 기이한 짐승들이 즐비하고 그리스 신화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신과 괴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것들도 그럴 것이다. 그런 풍성함들에 의해 인류는 살찌워지고 풍요로와져왔다. 헐리우드는 그런 것들을 미국풍의 에니메이션으로 변주해 흥행에 성공하고 무협지건 게임이건 그런 환상성에 대개 의지한다. 그런 것들도 물론 상상력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그런 것이 다가 아니다.
불은 뜨겁다.
이 말을 생각해 보자.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우연히 불이 발견되었고 불에 대해 모르다 보니 별의별 사건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움막집이나 동굴 속의 살림살이가 타버릴 수도 있고 어린 아이가 손을 데었을 수도 있다. 마침 어른이 그 자리에 없었고 어린 누이만 곁에 있었다고 해보자.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동생 앞에서 그녀 역시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했을 것이며 동굴 밖의 어른들께 알리려고 급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마음 속의 갈급한 그 무엇이 최초의 발화가 되어 어떤 경로를 통해 언어의 옷을 입어나갔을 것이다. 그 어휘와 문장이 여러 갈래의 다기적 전파 갈래를 따르거나 독립적인 발전들을 이룩해 불, 화이어(fire), 화(火) 등등 현재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들로 빛날 것이다. 언어의 기원은 이보다 다채롭겠지만 어쨌든 ‘불은 뜨겁다’라는 말 자체가 언어의 역사 전후, 숨가쁜 사정들과 심연 등등을 머금고 있는 창조적 산물이며 그러기에 훌륭한 상상력이다. 상상력으로 보이기는커녕 단순한 문장이지만 그 내부와 맥락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이와같은 전복적 사태와 마주치는 것이다. 내가 하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심정으로 마루 끝을 거머쥔채 떨고 있는 온몸의 전율이 저 간단한 문장 안에도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여명기적 감각에 기반한 상상력은 떨림이 있고 울림이 깊다. 마음의 거문고 현을 튕기는 힘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타고 진하게 이어진다. 깊음을 머금은 그런 강물에 이것저것 이야기의 살이 붙고 플러스적 상상력이 덧붙여서 신화나 전설, 설화들을 이루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이 근원성이 많이 상실되었다고 본다. 상상력의 시대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놀랍도록 특이한 아이디어나 상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늘어감에도 공허가 불쑥불쑥 생기는 것엔 이런 이유가 클 것이다. 상상력의 근원은 채우는 것도 아니고 덜어내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얼음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 미운 것은 밉고 좋은 것은 좋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맞는 것은 맞는 것이다.
화려하고 섹시하고 짜릿하고 달콤하게 번져나가는 상상력의 봇물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원심력적 상상력만이 상상력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들의 본원에 해당되는 웅혼한 상상력이 있다. 구심력적 상상력이라고 불러도 좋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해도 좋다. 누군가 홍보하고 회자되어 알고 있거나, 화려한 수식어들로 꾸며지는 차원이 아니라 그 어떤 장식이나 오염이 들어서지 않은 상태, 바로 우리 각자의 ‘나’가 직통으로 느끼는 그 마음이다.
프루스트는 마들렌 과자를 베어 먹는 순간 기억의 문이 열리며 무의식의 향연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간 속으로 느닷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런 시간의 향유 속에서 탄생된다.
하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나의 유년기의 마루는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닮은 면이 있다. 그는 마들렌 과자를 베어 먹는 순간, 나는 마루에 누워 하늘을 올려보는 순간, 기존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로 진입해버린 것이다. 주어져 있던 일상의 벽이 홀연히 깨어지며 또다른 차원을 향한 입구를 넘어선 것이다.
직통적 감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이런 감각은 사람들마다 잠재력으로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르며 그 하나하나 속에 자기만의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이 오랜 시간 동안 숨을 죽인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쳐들어오는 감각의 손짓에 눈을 감고 있으면 스쳐 사라질 것이고 마음을 주면 그럴듯한 현실 세계를 무너뜨리며 본연적인 느낌의 바다로 안내할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