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환 한국무역협회 초빙연구위원·단국대 경제과 겸임교수 <사진=김학선 기자> |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해나가던 당시 미국에는 막대한 부를 축적한 두 명의 거부가 있었다. 카네기와 록펠러는 거의 동시대 인물로 가장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들이다. 그들은 평생 일궈낸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돌려준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 시기 세계적인 거부로 성장한 카네기와 록펠러는 돈을 버는 과정이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경쟁업체를 가차 없이 짓밟았으며 노동자들을 핍박했다. 또 그들은 철강과 석유 분야뿐만 아니라 손대는 사업마다 독과점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 당시는 아직까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부의 사회 환원 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지 않은 시대였다. 돈을 버는 것은 개인의 능력 문제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자신이 쌓아올린 돈을 헐어 사회적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 카네기는 시대를 앞서가는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그는 66세가 되던 해 평생 이룩해 놓은 철강사업을 청산하고 전 재산을 들여 자선사업에 뛰어들었다. 원래 그는 35세를 기준으로 전반기는 돈을 벌고, 후반기는 그 돈으로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인생 목표였다고 한다. 그는 당초 예정했던 시기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나머지 인생을 자선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자신이 거부가 되도록 도와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늦게나마 행하려는 각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자본가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지 않던 시기에 카네기는 이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록펠러는 이러한 카네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오랫동안 법망을 피해 사업을 확장할 궁리에 골몰했고 사회적 평판도 나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덕망 높은 어느 목사가 록펠러에게 그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권유했다.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록펠러는 당장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 ‘록펠러 재단’을 설립한 뒤, 교육과 의학, 문화 부문 등에 자선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자선사업은 실추된 록펠러의 이미지를 회복시켰다. 그의 이름은 점차 악명 높은 자본가에서 자비로운 자선사업가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부각되어 갔다. 자선사업을 통해 그의 개인 이미지가 개선되어 가면서 사업 또한 좋은 의미에서 더욱 성장해 갔다. 그런 경험을 통해 록펠러는 이런 말을 남기게 된다.
“잘 운영되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은 진정 훌륭한 비즈니스가 된다. 그것은 좋은 친구, 좋은 고객을 만든다. 사회적인 공익활동과 기업에 좋은 일, 이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카네기와 록펠러! 그들은 말년에 자신이 쌓아올린 부를 개인의 것만으로 돌리지 않고, 자선사업을 통해 사회로 환원시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들이다. 미국의 이러한 자선사업과 기부정신은 이후에도 이어져오고 있다. 최근 들어 이런 분위기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데는 빌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그 중심역할을 해 오고 있다.
버핏은 한 자선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그동안 저를 포함한 제 가족들은 이 사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한마디로 행운아들이죠! 제가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맹수의 점심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제가 만약 미국이 아닌 다른 먼 곳에, 다른 먼 장소에 떨어졌더라면 그야말로 하찮은 존재로 살아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위대한 사회 덕분이며, 그 속의 한부분에 제가 잘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와 같이 자신의 성공이유를 전적으로 사회시스템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 같다.
아직도 미국에서는 일반인은 연소득의 약 2%를, 부자들은 연소득의 약 6%를 매년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즉 부자들이 일반인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기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어떠한가?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오히려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기부활동에 나서고 부자들은 그저 생색내기 에 그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부문화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보여 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자발적이고 준조세 성격이 짙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정부주도였던 모금활동이 민간기구로 이양되면서 민간의 자발적인 기부문화가 확산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서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확대되었으며, 개인의 기부문화가 활성화됨에 따라 기부방식도 다양화되고 기부정보 채널도 확대되는 등 기부환경이 많이 변화되어 왔다.
또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한 관련 제도의 개선도 따랐다. 2011년에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한 사람들이 노후에 생활이 어렵게 될 경우, 정부가 돌보아준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명예기부자 법」, 이른바 '김장훈 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또 기부금에 대한 세금혜택을 늘리기 위한 세금공제제도도 개선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와 같이 기부금을 세금에서 공제해 준다거나 고액기부자를 명예의 전당에 올려주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진실된 기부행위는 이와 같은 제도적인 장치 마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 그리고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몇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중국집 배달원 고 (故)김우수 씨의 사연은 우리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는 중국집 배달원 생활을 하며 강남의 한 고시원에서 혼자서 어렵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70만원 안팎인 월급을 쪼개 매달 5만~10만원을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전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살아있을 때 “나눔 앞에서 가난은 결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삶에서 어느 한 순간 빛이라고 할 만한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매달 70만원 월급을 쪼개 아이들을 도울 때만큼은 내 삶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해 모두를 숙연케 했다.
기부는 남을 위해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며,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기부금은 아무리 적은 금액이어도 값지다. 지금까지 국가나 사회에 기부금을 낸 분들을 보면 돈이 많아서 기부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푼푼이 모은 돈이거나 여유가 있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통해 절약한 돈을 기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기부는 어떠한 원칙에 따른 일률적인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한다. 많이 벌어야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평생 나누지 못할지도 모른다. 꼭 돈으로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의 지식, 경험이나 갖고 있는 재능을 나눌 수도 있다. 나아가 시간을 나눌 수도 있고, 시선을 나눌 수도 있고, 생각을 나눌 수도 있고, 마음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도 늘려나가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우리가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헐벗고 못 먹는 사람이 많은데 외국에 원조를 하는 건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가 않다. 지난날 우리가 받았던 그 원조를 발판으로 우리는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지 않았는가! 과거 우리가 받았던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를 돌려주어야 한다.
더욱이 원조란 반드시 공짜로 주는 것만은 아니다. 원조는 장기적인 투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원조를 주는 나라와의 무역을 확대할 수가 있고 자원협력증진을 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경제면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우리의 성실하고 진지한 협력파트너로 삼을 수가 있다. 결국 원조를 통해 전 세계에 우리의 얼과 이미지를 심고 있는 것이다.
저자 이철환 프로필
- 20회(1977년) 행정고시 합격
- 경제기획원과 재정경제부 근무 (종합정책과장, 국고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
- 공직퇴임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금융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역임
- 현재 한국무역협회 초빙연구위원 겸 단국대학교 경제과 겸임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