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3일(현지 시간) 전쟁 종식을 위해 우크라이나 군이 여전히 굳게 지키고 있는 동부 돈바스 지역 도네츠크주(州) 북서부 최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이 일대를 '비무장지대'로 전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도네츠크 최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엄청난 양보를 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군도 우크라이나 군이 철수하는 만큼의 동일한 면적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 '요새 벨트'에서도 병력 철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20개 조항의 평화안 수정안이 마련됐고, 이를 미국이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지난 수 주 동안 공동 평화안을 만들기 위해 협상을 벌여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비무장지대에 크라마토르스크와 슬로비얀스크 등 철통 같은 '요새 벨트(Fortress Belt)' 도시들도 포함될 수 있다고 했다. 요새 벨트는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기습 침공한 이후 집요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아직도 함락하지 못한 천혜의 요새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을 러시아가 장악할 경우 이를 발판으로 삼아 향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공세를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 쟁점은 그 동안 여러 차례 협상을 좌초시킨 핵심 이슈 중 하나"라면서 "젤렌스키가 평화안 협상과 관련해 타협할 의지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 "현재 전선 기준으로 전투 중단"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현재 전선을 기준으로 전투 행위가 중단된다고 했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키, 자포리자, 헤르손 등 4개 주 전선에서 병력 배치선은 종전 합의가 체결된 그 날짜를 기준으로 사실상 접촉선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현재 위치가 군사적 분계선이라는 뜻이다.
그는 "분쟁 종식을 위한 군대 재배치와 향후 잠재적 자유경제구역의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실무 그룹이 소집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비무장지대 설치는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비무장지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자유경제구역'이라고 표현했다"며 "이러한 표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지향적인 사고방식과 전쟁터 인근 지역의 풍부한 광물 자원에 매력을 느끼는 미국 기업들을 겨냥한 것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 "나토 가입 포기 명시 안 해… 병력은 80만명 유지"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수정안이 우크라이나에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공식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여부는 회원국들의 선택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쟁점, 즉 우크라이나 군이 아직 지키고 있는 도네츠크 북서부 지역의 영토 양도 문제와 러시아가 장악한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 운영권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도네츠크 지역의 80%는 러시아 군이 장악했지만 나머지 20%는 우크라이나 군이 지키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대 쟁점인 영토 양도와 관련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정상급 회담을 할 준비가 돼 있다"며 "영토 문제 같은 사안은 정상급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포리자 원전 운영권에 대해서는 "타협안으로 미국과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경영권과 수익을 공유하는 방안이 (미국 측에서) 제안됐다"고 했다. 원전 지역과 그 주변도 자유경제구역으로 조성될 수 있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 에너지를 거래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면서 "러시아도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이번 수정안은 당초 미국이 러시아와 상의해 마련한 초안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담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초안에는 러시아 측 입장이 크게 반영된 28개 조항이 담겨 있었지만 이후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적극 협상에 나서 불리한 조항과 내용을 제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수정안은 전쟁 종식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최선의 노력"이라면서 "이제 (전쟁 종식의 향방은) 러시아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수요일(24일)까지 답변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평화안에는 이외에도 우크라이나 안보와 관련 ▲우크라이나 평시 병력 80만명 유지 ▲우크라이나 유럽연합(EU) 회원국 후보 자격 유지 ▲유럽의 군사 지원 ▲미국의 양자 안보 보장 등이 담겼다.
또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투자펀드를 조성하고 미국 기업들이 에너지 부문을 포함해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1000억 달러를, 유럽도 비슷한 금액을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NYT는 "최종 목표는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최대 8000억 달러를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 "러시아 거부할 가능성 커"… 크렘린궁 "푸틴 대통령, 보고 받아"
국제 외교가에서는 러시아가 미·우크라 평화안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 수정안 내용이 러시아 측 입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는 도네츠크를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자포리자 원전을 우크라이나에 반환하는 방안도 일축해 왔다"고 했다.
한편 러시아 크렘린궁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최근 협상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4일 "우리측 입장을 정립하고 조만간 (미국 측과) 접촉을 재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새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크렘린궁은 심각한 결과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는 평화적 해결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다"며 "만약 그들이 모든 것을 방해하려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에게 막대한 무기를 지원하는 동시에 가능한 모든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