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흐르듯 사유하는 작가 이강소 대구미술관 회고전
반세기 걸친 자유로운 예술세계 130점 통해 조명
'曲水之遊 곡수지유:실험은 계속된다' 내년2월까지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제 그림은 이미지를 따라 그린 것이 아닙니다. 그린 게 아니라 그려진 것이죠. 물 흐는대로, 붓 가는대로 심상을 담습니다. 조각도 마찬가지에요.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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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 이강소 청명 淸明-16128, 2016,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94x259cm [사진=대구미술관] 2025.10.08 art29@newspim.com |
올해로 작가 활동 50년을 맞는 이강소(82)는 대구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지며 첫 마디로 '일부러 꾸민 작품이 아님'을 강조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물 흐르듯, 바람 불듯 자유롭게 사유하며 무념의 상태에서 붓을 들어 나온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업 50주년을 결산하는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의 타이틀도 '曲水之遊 곡수지유'을 앞세웠다.
이제는 어느새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원로작가가 된 이강소가 대구미술관 초대로 '곡수지유: 실험은 계속된다'를 개막했따. 내년 2월22일까지 계속될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 실험미술 현장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작가의 여정을 회화·조각·판화·드로잉·사진 등 130여 점이 출품됐다.
전시타이틀의 '곡수지유'는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잔이 지나가기 전에 시를 짓던 동양의 풍류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 동진시대의 명필 왕희지가 353년 난정에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지어 앉아 시를 읊으며 즐긴 것에서 비롯됐다. 이는 이강소가 평생 추구해온 예술관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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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낙동강에서 펼쳤던 이강소의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제작된 대구미술관의 이강소 회고전 포스터. 2025.10.08 art29@newspim.com |
전시는 '곡수지유'와 '실험정신'을 두 축으로 하며, 130여 점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이강소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고 있다. 흐르는 물과 순간적 영감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아우르는 '곡수지유'는 이강소 예술에서 낙동강이라는 구체적 장소와도 맥이 닿는다. 낙동강변은 이강소의 실험이 시작된 현장이자 예술적 원형을 품은 장소다. 흐르는 강물과 모래사장,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한 시간이 새로운 미술을 향한 열망의 토대가 됐다.
'실험정신'은 그의 작업을 이끈 또 하나의 원동력이다. 이강소는 1943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5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실험미술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1969년 '신체제'라는 그룹을 결성했고, 1970년대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에꼴드서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곤 1974년 고향 대구로 내려와 대구현대미술제를 창설했다. 대구현대미술제는 한국 최초의 전국적·국제적 현대미술제로, 이후 전국 각지로 현대미술제가 퍼져나가도록 하는 도화선이 됐다. 구상작업과 앵포르멜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실험미술'을 전면에 내세운 이강소의 무모하리만치 전복적인 도전은 오늘 다시 봐도 새롭다. 이 시기 실험정신은 회화·조각·판화 등 전통매체로 이어지며 한층 심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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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대구미술관의 이강소 회고전 '曲水之遊 곡수지유 실험은 계속된다'의 전시전경. [사진=대구미술관] 2025.10.08 art29@newspim.com |
전시는 최근작으로 시작한다. 대표작의 하나인 '청명'(2016~) 연작은 맑고 막힘 없는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신작인 '바람이 분다'(2022~)는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다. 무채색의 회색그림을 고수하던 작가는 "요즘에는 색이 나를 계속 유혹한다"며 원색을 과감히 쓰는 이유를 토로했다. 이로써 그의 그림은 여든에 접어들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970년대 대표작들은 한국 실험미술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파리비엔날레 출품작 '무제 1975-31', 일명 '닭 퍼포먼스'는 전시장 한가운데 살아있는 닭을 매어두고, 닭의 움직임에 의한 흔적을 작품으로 선언한 파격적 작업이다. 예측하기 어려운 우연의 순간을 예술로 바꾼 이 작업은 한국 실험미술사를 논할 때마다 소환된다. 또 이강소를 국제무대에 알린 계기가 됐다.
비디오 작업 'Painting 78-1'(1977)은 투명한 유리 위에 붓질로 화면을 채우는 과정을 담은 영상으로, 회화를 완성된 결과가 아닌 그려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한다. 인터넷은 물론 컬러TV조차 보급되기 전이었던 1977년에 시도된 이 작업은 회화와 비디오를 결합하여 매체 확장의 전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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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이강소 회고전 '曲水之遊 곡수지유 실험은 계속된다' 중 어미홀의 설치작품. [사진=대구미술관] 2025.10.08 art29@newspim.com |
중앙 섹션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서 오늘날까지 이강소 회화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회화는 직접적인 서사를 덜어내면서도 자연의 형세나 물의 흐름같은 잔상을 남긴다. 흥미로운 것은 이강소의 회화는 보는 이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저마다 크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멀리서 보면 고요한 산세 같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면 능선이 되고 이내 큰 비를 머금은 하늘로 변한다. 무한하게 변모하는 화면은 '살아있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그의 회화의 묘미는 바로 이 점이다.
조각 또한 198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그는 서구 조각처럼 덩어리에서 형태를 조작하기보다, 자연의 질료와 기운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했다. 'Becoming(되어감)'이라 명명한 이 작업은 흙, 불, 바람, 빛 같은 자연의 요소와 작가의 몸이 어우러져 탄생한다. 작가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우연들이 더해지며 그의 조각은 스르르 '되어진다'. 무의식과 의식의 합작인 것.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 이강소가 주도한 실험미술운동과 대구현대미술제를 중심으로 다룬 아카이브공간도 조성됐다. 귀중한 자료들이 한데 모여 한국 실험미술운동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관 로비인 어미홀에는 이강소의 첫 개인전 출품작 '소멸'(1973)을 중심으로 갈대와 브론즈 조각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변모했다. 창으로 스며드는 자연광과 흰 갈대 설치가 어우러지며 관객은 낙동강변과 현재의 미술관을 동시에 경험하고 곡수의 흐름 속에 자리한 작가의 예술을 체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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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 무채색 그림에서 최근들어 다양한 색채들이 들어간 작업을 시도 중인 이강소 작가가 작품 앞에 섰다. [사진=대구미술관] 2025.10.09 art29@newspim.com |
전시를 기획한 이정민 학예연구사는 "이강소의 예술은 반세기 동안 이어진 실험과 확장의 여정이었다. 이번 전시는 그 궤적 속에서 탄생한 작품세계를 다각도로 선보이고, 대작들이 지닌 깊이와 울림까지 체감할 수 있는 마당으로 꾸몄다"고 밝혔다. 한 예술가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가능성을 조망하며 관람객 또한 그 여정에 동행해 자신만의 체험과 해석을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회화 설치 조각 판화 등 모든 작업을 인절미를 만들 듯 '툭툭툭' 던지는 태도로 작업하며 대구 출신 작가로서 자부심을 보여왔던 이강소는 이제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가 됐다. 여든이 넘어서도 실험을 멈추지 않는 자세가 그를 고인 물이 아니라 새로운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81세이던 지난해 세계적인 갤러리인 오스트리아의 타데우스 로팍과 전속계약을 맺어 화제가 됐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데 이어 6월에는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는 파리의 타데우스 로팍에서 1970년대 퍼포먼스를 비롯해 근작과 신작을 모아 호평리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강소 회고전은 2026년 2월 22일까지 계속된다. 월요일 휴관, 관람료 성인 1000원.
art2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