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스위스가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39%의 폭탄 관세를 맞자 누구 책임이 큰 지를 놓고 '비난 게임'에 빠져들고 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3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가장 큰 비난의 화살은 일차적으로 카린 켈러-주터 대통령을 향해 있지만 스위스의 거대 제약업계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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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대통령. [사진=로이터 뉴스핌] |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켈러-주터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오후 2시(미국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 트럼프가 스위스에 39% 관세를 매기겠다고 발표하기 10시간 전이었다.
트럼프는 통화에서 연간 400억 달러(약 55조5000억원)에 달하는 미국의 무역 적자를 거론하며 "이는 미국에서 돈을 훔쳐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해소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켈러-주터 대통령은 트럼프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으며 자신이 준비한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 제안에 만족하지 못한 트럼프가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켈러-주터 대통령은 다음날 "스위스가 미국으로부터 돈을 훔친 것이나 마찬가지니 무역 적자에 상응하는 관세율을 얻어맞아야 한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스위스에 적용할 관세율은 39%라고 발표했다. 트럼프가 '해방의 날'이라고 선언했던 지난 4월 2일 발표한 31%보다 8%포인트가 높아진 것이었다.
스위스 주간지 존타그스차이퉁(SonntagsZeitung)은 양국 통화를 놓고 "스위스 최대의 실패"라고 평가했고, 현지 타블로이드 블릭은 "1515년 프랑스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스위스가 겪은 최대의 패배"라고 말했다.
FT는 "트럼프는 스위스가 연방국경일을 기념하던 금요일(1일) 세계 최고 수준 중 하나인 39%의 관세율을 발표했다"며 "켈러-주터 대통령은 미국과의 무역 협정 전망에 대해 심각하게 오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스위스 정부는 영국과 같은 수준의 합의, 즉 10% 관세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스위스는 지난 4월 미국에 1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약속하며 조기에 무역 합의를 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켈러-주터 대통령은 지난 7월 다른 많은 국가들이 미국과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자신의 트럼프 대통령과 소통을 잘 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켈러-주터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스위스가 미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매우 부유한' 알프스 국가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한 스위스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 시작 때부터 10%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밝히며 스위스가 미국에서 돈을 훔치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통화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며 "켈러-주터 대통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스위스 산업계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제약업계의 책임도 거론되고 있다.
시계 제조업체 브라이틀링의 최고경영자(CEO) 조르주 케른은 "트럼프를 화나게 한 제약 산업이 우리나라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 제약 업계는 수출 물량의 약 60%를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노바니스와 로슈의 미국 자회사인 제네텍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약값 인하 내용을 담은 편지를 받은 제약회사 중 하나였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스위스는 미국에 엄청난 양의 의약품을 수출하고 있다"며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약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스위스는 미국의 고율 상호관세를 피하기 위해 협상안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 파르믈랭 스위스 경제장관은 3일 RTS 방송과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 배경을 정확히 파악한 뒤에야 향후 대응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촉박해 7일까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긴 어려울 수 있지만 선의를 보이고 협상안을 조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