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개인예산제 본사업…개편 필요성
구조적 예산 한계…활동지원 급여 20% 제한
무인 키오스크·디지털 접근성↓…또 다른 장벽
정부는 매년 장애인 활동지원, 일자리, 건강권 등 예산을 확대하고 새로운 시범사업도 추진하고 있지만, 당사자들의 체감도는 여전히 낮습니다. 제도는 있지만 접근은 어렵고, 예산은 있지만 삶은 바뀌지 않는 현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예산의 구조적 한계를 살펴보고, 장애인 복지 예산의 실효성을 짚어본다.
[세종=뉴스핌] 이정아 기자 = 정부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의 자립과 참여 보장'을 주요 과제로 내세운다. 매년 장애인 복지 예산이 증액되고 다양한 시범사업이 추진되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제도가 있어도 현실은 멀다'는 말이 나온다.
획일적 복지에서 벗어나 장애인의 선택권과 접근성을 높이려는 두 가지 정책인 '장애인 개인예산제'와 '디지털 접근성 강화'가 대표적 시도다. 하지만 정책 설계의 허점과 제한된 예산 규모로 인해 당사자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 "개인예산제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상황이죠"
20일 정부에 따르면 장애인 개인예산제는 현재 공급자 중심의 복지 서비스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제도다. 장애인 본인이 자신에게 배정된 예산을 직접 설계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해 획일적인 급여 대신 '맞춤형 지원'을 받게 하자는 취지다. 영국, 네덜란드 등 복지 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모델을 한국형으로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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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올해 8개 지역에서 210명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내년에는 전국 17개 지역 410명으로 개인예산제 본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 이를 위한 본예산은 15억원이 편성됐다. 당사자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자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기대는 컸지만, 실제 참여자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의 구조다. 현재 개인예산제 시범사업은 장애인 활동지원 급여 20% 범위에서 개인예산을 할당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새로운 급여가 지원되는 게 아니라 기존에 사용하던 급여에서 20%를 개인예산제로 사용하다 보니 기존 급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를 두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시범사업 참여자의 절반 이상이 중도에 포기했으며, 가장 큰 이유(50.4%)는 활동지원 시간 감소였다. 돌봄 서비스가 줄어든 상태에서 자율성이 늘어났지만, 실질적인 생활 지원은 오히려 후퇴한 셈이다.
여기에 시범사업의 규모 자체가 워낙 작아 형평성 논란과 평가의 타당성 문제도 제기된다. 지역별·장애유형별 편차를 반영하지 못한 채 소수의 사례에 기반한 정책평가가 진행되고 있어 실효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중증 발달장애인 등 스스로 욕구를 표현하기 어려운 당사자에겐 개인예산이 실질적인 '선택권'으로 작용하기 어렵다. 제도가 오히려 서류작성과 예산계획 부담만 늘리는 구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개인예산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선 기존 활동지원 삭감 없이 별도의 예산이 투입돼야 한다. 수요자가 '추가 선택'을 할 수 있어야 제도 본연의 의미가 살아난다.
조한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개인예산제는 이를 위한 별도의 예산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으 활동보조 서비스 예산의 일부분을 전용해서 쓰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개인예산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민선 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중증 발달장애인과 경험이 부족한 장애인에게 아무리 많은 예산이 가더라도 당사자의 선호와 욕구를 충분하게 반영한 예산 지출계획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당사자의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중증 장애인들도 주도적인 삶을 사는데, 개인예산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며 "한국형 개인예산제 모델 개발과 사람 중심적 접근, 동료 지원 등이 함께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디지털 사회의 또 다른 배제…접근성은 선택 아닌 필수
정보화 시대, 디지털은 복지와 일상을 잇는 핵심 인프라다. 그러나 장애인에게는 이 디지털 환경이 또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정보취약계층의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이며, 특히 장애인을 대상으로 정보통신(ICT) 보조기기 지원 예산은 전년 대비 2배 증가한 60억원으로 편성됐다. 이에 따라 약 4739명의 장애인에게 화면낭독기, 특수마우스 등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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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챗GPT] |
그러나 이 규모는 보조기기 수요를 충족하기에 역부족이다. 보조기기 지원 신청자는 매년 1만명을 훌쩍 넘긴다. 사업 신청자 절반 이상이 '떨어지는' 구조다. 지난 13년간 누적 지원 인원은 5만명 수준에 불과해, 전체 장애인 대비 지원율은 2%도 되지 않는다.
지원이 절실한 시각·청각장애인들은 여전히 필요한 보조기기를 자비로 구매하거나, 아예 접근을 포기하고 있다. 게다가 고령 장애인의 경우 인터넷 활용 능력 자체가 매우 낮아 세대·계층 내 정보격차는 더 심화하고 있다. 장애인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일반인의 82.8%에 그쳤다.
접근성 수준도 열악하다. 공공기관 웹사이트 일부를 제외하면 민간 웹·앱 환경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 텍스트 미비, 자막 없는 영상, 화면 확대 기능 부재 등 기본적 요소조차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 실제 웹 접근성 준수 수준은 평균 100점 만점에 65.8점으로, 절반 이상의 웹페이지가 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는 상태다.
무인 키오스크, 온라인 비대면 서비스의 급증 역시 장애인에게 새로운 배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비장애인에게는 편리함이지만, 장애인에게는 '출입구가 없는 문'이 되고 있다.
디지털 접근성 개선은 예산과 연계된 정책 추진이 시급하다. 정보통신 보조기기 지원 예산을 대폭 증액해 수요자의 절반 이상이 아닌 대부분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AI 기반의 신규 보조공학기기 개발, 키오스크 음성안내 장치 보급 등 디지털 포용 사회를 앞당길 수 있는 투자가 시급하다.
조 교수는 "보조기기 사업 대상은 주로 저소득 장애인인 데다 제공하는 품목이 다양하지 않다"며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도 진전이 없다. 시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의 키오스크 접근성은 도대체 언제 해결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최근 무인 키오스크, 온라인 비대면 서비스의 확산은 장애인에게 새로운 장벽으로 작용한다"며 "추가 예산 확보를 통한 종합대책을 추진해 장애인의 사회 참여와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plum@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