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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상) 박용진 "역사 잃은 지혜,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 술수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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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전북 장수 출신, "학업에 열중 안했지만 나서는 아이"
전교조 결성 당시 고등학교 세 차례 교내 시위 주도, "가장 큰 충격"
학생 운동 거쳐 진보정당 운동, 민주당에서도 소신 지켜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과 정치 입문 과정 및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전 의원은 14일 오후 유튜브 채널 '뉴스핌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스토리에서 어린 시절에 "막 나서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친구 관계는 좋았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고교 시절 은사였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한 것에 대해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장수 대변인이었던 본인의 마지막 논평이었던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문구에 대해 "그런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1971년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집성촌이 있는 장계면에서 거주하다가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전주시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 1979년 부친이 서울로 이동하면서 서울화계초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거쳐 현재까지 서울 강북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 2025.01.13 dedanhi@newspim.com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그의 은사였던 이수호 선생이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후 1991년 대학 선배인 김귀정 씨가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이후 서총련 산하 북부총련 의장직을 역임했다.

전역 후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부장과 1997년 9월 국민승리21의 언론부장 등을 지냈고, 대선 이후에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갔다. 2011년 진보대통합 논의가 확발해진 이후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에 합류했다.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 이후 20대와 21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건희 삼성회장의 차명계좌 문제와 현대자동차 문제를 지적해 리콜 결정을 이끌고 유치원 3법 등의 성과를 내면서 의정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박 전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기자, 이하 채 기자) 안녕하세요. 정치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살펴보는 kyd 방송의 폴리티션 스토리. 저는 진행을 맡은 정치부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 주실 스웨덴 린넨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안녕하십니까?

-(채 기자) 오늘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님을 모시고 정치 역정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용진 전 의원, 이하 박 전 의원)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채 기자) 의원께서는 그동안 진보 정당 활동과 민주당에서도 오랜 기간 진보의 그 소신을 지켜오신 정치인이십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박 전 의원) 약간 이렇게 막 나선다 라고 해야 될까요. 친구들이 볼 때는 약간 꼴뵈기 싫은 아이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봄이면 선생님을 조르고 애들 선동해서 야외 수업하도록 하고 첫 눈 오면 수업 땡땡이 치고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고. 교실 분위기를 학구적이지 않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인 것 같아요.

생활 기록부를 보면 리더십이 있고 이렇게는 쓰여져 있더라고요.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친구 관계는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는 것이 순탄치 않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6월 항쟁 과정이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았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바로 서울로 전학을 온 케이스였는데요.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오랫동안 계셨더군요.

▲(박 전 의원) 아버지가 경찰이셨어요. 당시 서울에 인구가 펑펑펑 늘어나고 있을 때잖아요. 경찰서를 새로 지어서 전국에서 인원을 차출하셨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운 좋게 서울로 오시게 된 것이죠. 아버지 때라서 온 가족이 서울로 왔구요.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은 전주에서 입학을 했어요. 전주 진북 초등학교라고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전주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화계 초등학교를 2학년 때 전확을 왔어요.

그 동네에서 화계초등학교,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제알 가까운 곳이 성균관대학교더라고요.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도 거기서 낳고 국회의원도 거기서 하고 지금도 그냥 계속 살고 있어요.

-(최 교수) 각자마다 어렸을 때의 인생 스토리가 하나씩 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혹은 이벤트가 있을까요.

▲(박 전 의원)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반장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학생회장이 되고, 사실상 총학생회장 역할을 다 했어요. 임기를 마치고 나도 이제 공부하자 했을 때 1989년도에 전교조가 결성이 된 것이에요. 전교조 결성 한 달 전부터 낌새는 알았고, 학생회 활동도 했었고, 부학생회장으로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전교조를 지지하고 호응하는 액션을 해보자는 제안이 안팎에서 많이 왔었어요. 당시 전교조 위원장도 하고 민주노총 위원장도 했던 이수호 선생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어요.

친구들한테 선생님을 지지하기 위한 보호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선생님들이 교무회이하실 때 자율학습 시간 30분 동안 아이들을 다 밖으로 끌어내서 집회를 하기로 한 거죠. 이제 그렇게 하려니까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방송반 반장을 불러다가 '너 방송반 열쇠 있지 그 스위치 켤 수 있지'를 다 물어보고 그때 고3 학생회장한테는 이러이러한 내용의 성명서를 쓰도록 해서 읽도록 하고 또 각 반의 반장들하고는 몇 시 몇 분에 이 방송이 나오면 그걸 신호로 '다 나와라'고 했어요.

30분 안에 이것을 다 만들어 내야 되는 일이잖아요. 그거를 했던 과정이 되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친구들하고 만나면 그때 얘기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흥분됐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박용진 다시 봤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당황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친구들이 일사분란하게 다 같이 움직이나. 짜기는 같이 짰지만 5분, 10분 안에 1200명이 싹 다 교문 앞으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인 것이에요.

1200명이 다 교문 앞으로 모여서 교무실에서 선생님도 몰랐대요. 수위 아저씨가 교무실로 연락해서 그때서야 선생님들이 쫒아나오셔서 '들어가라'고 난리가 났었죠. 전교조 결성이 일요일이었는데 저희가 월요일 아침 8시에 집회를 했거든요. 전교조 결성을 지지하는 고등학생의 첫 번째 집회로 기록돼 있어요. 교내 시위를 두 번 더 했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죠. 저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었고요.

-(최 교수)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에 입문을 한 셈이네요.

▲(박 전 의원) 그게 무슨 정치겠어요. 그냥 해야 하니까 한다는 느낌이었고요. 저희가 아들이 셋이어요. 큰 형 두 분과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아버지는 딸을 갖고 싶어하셨는데 계속 아들만 나오니까. 그런데 셋째 아들이 늘 말썽인 거에요. 형들은 다 같이 신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얌전하고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공부 잘하고 했는데 저만 유독 튀고 그러니까 어머니 부탁이 '제발 졸업만 해라'고 부탁하셨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외부 압력이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졸업 못합니다'는 위협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검정고시 치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전라도 표현으로 기함을 하시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데모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을 가서 데모하니까 '데모 그만해라'고 그러시긴 했는데 아무튼 부모님 속 썩이는 일들은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채 기자)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을 하셨잖아요. 의원님이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는 약간 쇠퇴기에 빠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 학생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박 전 의원) 그때는 전대협 세대에서 한총련 세대로 바뀌었어요. 전대협과 한총련의 가장 큰 차이는 전대협은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 민중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회의인데 한총련은 그야말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해서 대학생으로서 찾아야 할 권리, 자신의 위무 등을 잘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라고 하는 학생회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자. 대학 발전과 교육 재정의 확보, 이런 쪽에 집중하자고 더 넓기도 하고 문턱이 낮은 단체를 지향했어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에요.

학생들이 투표로 정치 권력을 견제하거나 바꿀 수 있다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가두투쟁, 돌멩이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이제 없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던 시절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거는 다 앞서가던 학생운동 세력이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뒤진 거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이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이것은 가짜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자기 아집이 교차되고 있었던 시절이에요.

제가 총학생회장이 되니 1 2학년 때 봤던 그런 학생들이 아니고 그런 정국이 아닌 것이에요 대통령도 노태우에서 YS로 바뀌었고요. 야당은 큰 소리치고 국민들도 투표로 여기도 혼냈다 저기도 혼냈다를 몇 번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총학생회장을 하는 중에는 답을 못 얻었고 오히려 군대를 가서 느꼈거든요. 평범한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이 되자마자 온 혹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직장을 갔던 친구들과,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같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제가 5학년을 하다가 군대를 가서 25살에 갔으니까. 20살, 21살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나보다 고참인데, 이들이 하는 고민을 들어보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이들의 고민은 되게 구체적인데 나는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학생 운동하다가 총학생회장을 하고 잡혀자기도 하고 구속도 됐잖아요. 군대를 안 가도 됐어요. 빠질 방법이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또 '제발 군대는 좀 가라'고 하셨어요. 웬만한 부모님들은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게 하려고 그러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닌 거야.

큰 아들 군대 갔다 왔지, 작은 아들도 갔다 왔지, 그래서 아들 군대 보내면서 서운하고 아련한 것은 다 겪어본 것이에요.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테니까 마지막 효도한다고 생각하고 군대 가라"는 거에요. "나 군대 안 갈 방법이 많은데"라고 했더니 "아 시끄러워. 군대 갔다 와"라고 해서 갔는데 생각해보니까 어머니 말씀 듣기를 잘한 것 같아요. 정치하면서도 떳떳하기도 하고 군대를 가서 오히려 못 봤던 것을 많이 봤거든요.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에너지가 좀 넘치는 타입이거든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도, 감옥에 들어갔어도 늘 즐거웠어요. 즐겁고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할 일을 제깍제깍 다 해내면서 살았고, 군대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고, 못 봤던 것, 잘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고, 저보다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당하는 수모나 이런 것들도 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서 학생운동에 대한 정립,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가다듬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어머님의 역할이 크셨는데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박 전 의원) 불편했죠. 아버지는 대공과 형사도 하셨는데 아들은 데모해요. 총학생회장이에요. 이른바 운동권 우두머리야.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 당선되고 학교 총장과 저녁 자리가 있지만, 관할 경찰서 서장과도 식사 자리를 한번 하더라고요. 동대문경찰서 서장과 자리를 했는데 제가 "윗사람들에게 좀 전해줘라. 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혹시라도 피해를 보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엄포 비슷한 것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아머지는 평범한 경찰 공무원으로 지내셨는데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노동자들 파업 지원 투쟁을 하다가 잡혀간 거였어요.

장안동 대공분실, 남영동은 유명한데, 장안동에도 그런 시설이 있는데 거기서 사장님으로 표현되든지 대표로 표현되는 분이 있었는데 아마 경찰서장쯤 되는 모양이에요. 무역상사로 외부는 위장이 돼 있고요. 거기 가서 조사를 한참 받고 있는데 잠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 대공분실장이 가운데 앉고 소파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계시더라고요. 제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 허리를 계속 조아리면서 "죄송하다.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이렇다"고 순간 아버지한테 미안한 것도 있는데 막 화를 냈어요.

아버지께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 사람한테 아버지가 이렇게 조아리고 계시냐"고 했더니 "용진아 앉아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별로 따뜻한 분은 아니셨거든요. 아들 둘이 있으니 셋째가 눈에 보이시겠어요. 밑에는 딸이 또 있으니까 막내 아들이 눈에 보이시겠어요. 그냥 집에나 들어오고 밥이나 먹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그 사람한테 조아릴 때 너무 속이 안 좋았고, 가시다가 저랑 헤어지는데 주머니에서 3만원을 꺼내서 딱 주셨어요. 그때 3만원은 아버지의 일주일 용돈이었을 것이에요. 이걸 주시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매 맞지 마라. 괜히 골병 든다' 그리고' 밥 굶지 마라'. 그러고 가시더라고요. 한참을 혼자 울었네. 그리고 이제 서울 구치소로 넘어갔을 때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랑 이야기하다가 다음 면회 때 어머니가 오셔서 "어제 아버지가 오셔서 파란색 수위를 입은 것을 보고 눈물이 나서 나갔다"고 그러시더래요.

나가서 우셨다고 그래서 "왜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죄 지은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고 나면 그 옷을 입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는 모습을 봤는데 당신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 옷을 입고 있나 싶으니까 화도 나고 내가 왜 경찰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셨대요. 그래서 나와서 막 우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은 아주 효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 불효를 많이 해서 너무 죄송하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 교수) 말씀을 아주 잘하시는데 어디서 배우셨나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좌중을 이끄는 능려깅 있었나요.

▲(박 전 의원) 대변인은 5년을 했어요. 우리 정치사에서 최장수 대변인일 거에요. 민주노동당에서 3년, 민주당에서 2년을 했는데, 민주당에서 2년 한 것도 기록이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 배지를 달지 않은 당 대변인을 2년 동안이나 했는데 그 동안 대표가 엄청 많이 바뀌었어요. 당 대표가 10번 바뀌는 동안 계속 당 대변이었어요. 다른 대변인은 계속 바뀌었는데 기자들이 박용진은 바꾸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기자들하고 인연도 깊고, 험난한 시절을 같이 겪으면서 큰 대과 없이 말 실수 없이 했던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요.

대변인들이 사실 파리 목숨이거든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휙 하고 날아가는데 그런 무리함이 없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말을 잘하고 말고는 스타일이었겠죠.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격상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감옥을 좀 오래 갔었어요. 나중에는 2년 3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때도 계속 독방이었어요. 하루에 편지지로 A4 용지 정도로 치면 거의 3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워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어요. A4용지로 보면 한 7장을 쓰는 것인데 어떤 내용으로 채울것인지를 머리 속에 정리해놓고 한 번에 쭉 써 내려가는 과정이 매일매일 훈련을 했다고 봐야해요. 아주 작은 일을 묘사하는 훈련도 되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잡혀가서 감옥에서 2년 3개월 있다 나왔거든요. 와이프한테 얼마나 미안해요. 매일매일 반성문을 와이프에게 써서 보냈는데 매일 사랑해요. 미안해요 이야기만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혼자 방에 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지붕에서 내려와서 집을 짓는 과정을 쭉 지켜보는 거에요. 거미줄에 햇살이 스쳐지나가고 먼지가 흩날리는 과정, 겨울해와 여름해의 비교, 아침 공기에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 까치가 바람을 타는 모습을 혹시 보셨어요? 바람을 타면 그네를 타는 것 같아요. 까치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을 보면서 '까치가 오늘 그네를 타네요'라고 쓴다거나 작은 푷션을 미세하게 쓰려고 하는 과정이 필력에는 도움이 크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논평을 쓸 때도 길게 안 쓰고 어떤 때는 짧게 해버렸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가 일해에요. 날일 자에 바다 해자인데 그분의 고향인 합천에서 공원이 지금도 있다고 해요.

그 공원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짓고 비석을 세운다고 했는데 다른 당에서는 군사 반란 수괴에 공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역사적인 반동행위라고 내는데 제가 냈던 논평을 '일해라고 한은 말은 횟집에나 어울린다'는 것으로 끝났어요. 더 욕할 필요도 없고, 일해라고 하는 말을 공원에 붙이지 말라는 걸로 그냥 끝났어요. 간략하게 하는 연습을 그때 감옥에 있을 때 했어요. 가장 힘들고 어려워도 나주에 다 좋게 해석하고, 그러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최 교수) 역사 잃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말을 남기고 이런 말을 남기고 대변인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박 전 의원) 말이 멋있잖아요. 원래는 원문이 뭐냐면 '역사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예요.그런데 제가 쓸 때는 둘 다 없는 것으로 맞췄어요. 그래서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가 됐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1988년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광고를 지하철에 이렇게 붙여놨어요. 그 옆에 카피가 딱 그거였어요. '역사를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을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고. 우와 가슴에 확 박히더라고요. 좋은 말이야 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 그것을 딱 내걸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민심 팀이에요. 그리고 평생 그것을 했어요. 역사와 민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술수와 잔꾀로 흘러갈 거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원칙 잘 지켜야 돼.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민주당으로 와서 2012년에 당대표 선거를 나갔어요. 한명숙, 박지원, 이인영, 박영선, 김부겸 문성근 이렇게 출마를 했어요. 이렇게 짱짱한 분들과 했는데 제가 컷오프를 통과했어요. 중앙위원회에서 박용진이 5등으로 통과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결과는 안 알려주지만 박용진이 최고위원은 되겠구나 하고 난리가 한번 났었는데 그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카피 내용이 책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어요. 그래서 사계절 출판사에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모른데요. 사장님이 아실까요 했더니 연결을 해주더라고요.

그때가 2012년인데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제가 누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시냐'고 그러는데 "남편이 원래 사장이었는데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대표를 맡으셨는데 남편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발행하실 때 그냥 거기다 쓴 카피였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글을 뽑아내셨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보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고 아마 남편이 본인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문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박용진 쓴 걸로만 나와요.

아마 사계절 출판사 사장님이 처음 쓰셨을 것 같아요. 말씀 그대로 저는 역사와 민심을 가지고서 정치를 해야지 잔꾀와 술수를 부리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보면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지금 당장은 배지 잃지 않고 뭐 재선 3선 4선 5선 6선 선수는 쌓여 나갈 수 있겠죠. 그런 선수가 쌓이면 뭘 합니까. 잔꾀와 술수로 평가돼 버리면 끝이지. 어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봤던 글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속 해가고 있어요.

-(최 교수)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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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KF-21, 내년 3월 양산 1호기 출고식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한국형 전투기(KF-21) 양산 1호기 출고 행사가 내년 3월 경남 사천 KAI 본사에서 열리는 방향으로 검토되고 있다. 뉴스핌이 단독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당초 2026년 연말로 잡혔던 일정이 약 10개월 앞당겨지는 '조기 실전배치 시나리오'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KF-21(당시 KF-X) 사업은 2015년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가 약 8조원(70억~80억달러 수준) 규모의 체계개발을 승인하면서 본궤도에 올랐고, 인도네시아가 개발비 20% 분담을 약속하며 공동개발 파트너로 참여했다. 이후 설계안 확정(2019년)과 2020년 9월 최종조립 착수 과정을 거쳐 2021년 4월 시제 1호기(001번기) 출고 및 명명식에서 공식 제식명 'KF-21 보라매'가 부여됐다.​​ 지난해 11월 29일 1000소티 비행을 달성한 한국형 전투기 KF-21. 이로써 전체 약 2000소티 중 절반을 완료하며 반환점을 돌았다. [사진=한국항공우주산업] 2025.12.09 gomsi@newspim.com 시제기는 단좌 4대·복좌 2대를 포함해 총 6대가 제작됐고, 2022년 7월 첫 비행에 성공한 뒤 2023년 초음속 돌파, 야간·무장분리 시험을 포함해 2024~2025년까지 누적 2000회 수준의 시험비행을 소화하면서 블록Ⅰ(공대공 중심) 체계개발 막바지 단계에 올라와 있다. 방위사업청과 공군은 이 시험 데이터를 토대로 2026년까지 '초도양산+작전운용시험·평가'를 동시에 진행해 공군 F-4E, F-5 등 노후 3세대 전투기를 순차적으로 대체한다는 이정표를 세워왔다.​ 당초 KF-21 양산기 전력화 로드맵은 2024년 양산계약, 2025년 최종조립, 2026년 하반기 대량 양산 출고 및 전투적합 판정, 2026~2028년 초도 대대급 배치 순으로 짜여 있었다. 실제로 방추위는 2025년 3월께 '올해 20대·내년 20대' 방식의 1·2차 양산계약(20+20대)을 의결했고, 1조9000억원 안팎(1차 20대 기준 약 1조9000억원)의 초도 물량 계약이 체결되면서 사천 KAI 공장은 2025년 5월부터 양산 1호기 최종조립에 들어간 상태다.​ 이 기본 시나리오에서 2026년 연말로 잡혀 있던 '양산 출고식'을 10개월가량 당겨 2026년 3월 사천에서 여는 방향으로 급선회한 것이다. 업계에선 "양산 1호기·2호기를 포함한 초기 물량의 기체·엔진·전장 계통 신뢰성 검증이 예상보다 순조롭고, 공군의 F-4E 조기 퇴역·북한 핵·미사일 위협 고도화에 따른 전력 공백 우려가 일정 단축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5년 개발 승인 이후 만 10년 만에 양산형을 내놓는 만큼, 대통령 참석을 전제로 한 '국가급 이벤트'가 될 것이란 전망이 업계에 확산되는 분위기다.​ KF-21 시제 1호기 출고식은 2021년 4월 경남 사천 KAI 본사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그 자리에서 "2032년까지 120대 실전배치" 목표가 공개되면서 한국의 '8번째 초음속 전투기 개발국' 도약을 대내외에 과시한 바 있다. [사천=뉴스핌]문재인 대통령이 9일 경남 사천시 고정익동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열린 한국형전투기 'KF-21 보라매' 시제기 출고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2021.04.09 photo@newspim.com 내년 3월로 예고되는 이번 출고행사는 시제기가 아닌 '양산형 1호기'가 주인공인 만큼, 시제기 롤아웃 이후 약 4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다시 사천을 찾는 장면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아랍에미리트(UAE)를 포함한 중동 순방 과정에서 KF-21을 한국 방산 수출 패키지의 핵심 품목으로 전면에 내세우며, 향후 수출형 블록Ⅱ·블록Ⅲ 개발과 현지 공동생산·부품 협력 구상을 함께 홍보해 왔다. 대통령실과 국방부, 산업부 안팎에선 "양산형 출고식이 사실상 '수출형 보라매'의 첫 공개 무대가 될 수 있는 만큼, 대통령 주관 행사로 격상할 명분이 충분하다"는 기류가 감지된다.​ 현 시점에서 군·방산업계가 그리는 '3·6·9 시나리오'의 뼈대는 비교적 선명하다. 내년 3월 사천 출고식을 통해 양산 1호기를 공개하고, 6월까지 공군·방사청 공동의 전투적합 판정(전투운용능력 평가)을 마친 뒤, 9월 전후로 공군 작전부대에 초도 인도를 시작한다는 시간표다.​ KF-21 블록Ⅰ양산기는 2026년 상반기 대량 출고 이후 강릉 제18전투비행단과 예천 제16전투비행단에 각각 1개 전투비행대대(20대 안팎) 규모로 나뉘어 초도 배치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어 2028년 이후 공대지·다목적 능력을 강화한 블록Ⅱ 80대는 횡성 제8전투비행단, 충북 지역 제19전투비행단 등으로 확산 배치돼 공군의 F-5, 구형 F-16 전력을 단계적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계획이다. 지난 11월 5일 국산항공기 FA-50와 함께 비행하는 손석락 공군참모총장의 KF-21. [사진=공군 제공] 2025.12.09 gomsi@newspim.com KF-21 사업은 개념연구 착수(2000년대 초) 이후 예산·기술 이전 문제로 수차례 좌초 위기를 겪었지만, 2015년 개발 승인 이후 10년 만에 양산형 출고 단계에 진입했다. 방산업계에서는 "전투기 체계개발-양산-수출까지 독자 사이클을 돌리는 소수 국가 반열에 올랐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방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KF-21 양산형 출고는 단순히 새 전투기를 들여놓는 차원을 넘어, 한국이 10년 주기의 전투기 개발·개량 사이클을 스스로 설계해 가는 수준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며 "2015년 개발 승인에서 2025년 양산 1호기, 2032년 120대 전력화로 이어지는 연표는 한국이 명실상부 '전투기 개발·수출국'으로 올라섰다는 증표"라고 했다. gomsi@newspim.com 2025-12-0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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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 조희대 대법원장 입건 후 사건 검토 [과천=뉴스핌] 김현구 기자 =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조희대 대법원장을 입건하고 본격적인 사건 검토에 들어갔다. 공수처 관계자는 9일 정례 브리핑에서 "(조 대법원장) 고발건은 한 두건이 아니다. 어떤 건은 수사 4부, 어떤 건은 1·3부 등에 있다"고 밝혔다.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사진=뉴스핌DB] 공수처는 고소·고발이 접수되면 선별해 사건화하는 것이 아닌 '자동입건'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 다수의 고소·고발이 접수된 조 대법원장은 피의자 신분이 유력하다. 조 대법원장은 대선 후보 시절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윤석열 전 대통령 사건을 지정 배당했다는 의혹 등을 받고 있다. 아울러 공수처는 최근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대한 감사원의 '표적 감사 의혹' 수사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해당 사건은 최재해 전 감사원장과 유병호 전 감사원 사무총장(현 감사위원) 등이 2022년 전 전 위원장을 사직시키기 위해 특별 감사를 진행했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공수처 수사1부(나창수 부장검사)는 지난 4일 감사원 운영쇄신태스크포스(TF)와 심의지원담당관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다만 공수처는 사건의 처분 시기 등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공수처 관계자는 "(처분 시기는) 수사팀이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언제 (처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한편 공수처는 윤 전 대통령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술자리 접대 의혹' 수사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 5월 김용민 민주당 의원은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지 부장판사가 1인당 100만~2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나오는 고급 룸살롱에서 여러 차례 술을 마셨고 단 한 번도 돈을 낸 적 없다는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제보를 받았다"며 의혹을 제기하고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이후 대법원 법원감사위원회는 해당 의혹을 심의한 후 "현재 확인된 사실관계만으로는 지 부장판사에게 징계사유가 있다고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수사기관의 조사 결과를 기다려 향후 드러나는 사실관계가 비위행위에 해당할 경우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공수처는 사건을 수사3부(이대환 부장검사)에 배당했고, 수사팀은 최근 그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공수처는 택시 앱 사용 기록 등과 달리 신용카드 사용 내역 등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hyun9@newspim.com 2025-12-0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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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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