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들의 지혜 듬뿍 담긴 산나물의 향연...'느리미' 탄생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산에서 바닷냄새가 난다/ 지천으로 돋아나는 미역취가 뿜어대는 시큼한 바닷냄새/ 산이 출렁거린다/ 꿀풀과 맥문동 자줏빛 눈부신 향내를/ 꿀벌들이 마구 넘나든다/ 괭이밥과 꽃다지가 온 산허리를 채우며 푸른 봄을 풀어놓는다/ 어쩌다 우리 할미들은 산 중에 바다를 만들었을까/ 평생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꿈을 꾼겔까/ 넘쳐흐르는 바다를 몸 속에 담은 겔까/ 짭짤하면서도 훅 입안을 상쾌하게 훔치는/ 누이와 에미는/ 산 중에 바다를 풀어놓고/ 깊고 깊은 자궁을 씻어낸 것일까/ 돌미역처럼 깊이 뿌리내리고 온 바다를 유영하는/ 미역취를 뜯는 손가락에/ 푸른 바다 뚝뚝 달려온다 <남효선 시 '산나물을 뜯는다' 전문 시집 『둘게삼』>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경북 울진의 대표적 전통 장시인 '바지게시장'에 나온 산나물.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 상큼비릿한 돌미역 향.달큰 쌉쓰름한 산나물 내음 어우러지는 울진의 봄
산야가 새 봄의 향을 풀풀 날리는 봄이다.
동해연안과 백두준령의 끝자락에 맞닿아 있는 울진지방의 봄은 바다가 토하는 상큼비릿한 돌미역 향과 태백의 너른 품이 키우는 달큰 쌉쓰름한 산나물 내음으로부터 온다.
울진의 온천마을이자 산중마을인 온정면 문골마을의 초입에 자리한 마을회관에 팔순의 안노인들이 왁자하다.
본격적인 농사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기여서 제법 여유로운 풍경이다.
손녀를 껴안고 연신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노할미, 함께 나눌 점심으로 산나물밥을 장만하기 위해 갓 뜯은 산나물을 다듬는 할미, 또 한 쪽에서는 이미 화투놀이가 한창이다.
나물얘기를 듣고 싶어 찾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옥분할미가 손사래부터 친다.
"나물 얘기 몸서리나니더" 하면서도 옥분할미가 산나물 얘기를 술술 풀풀 놓는다.
"그 때는 산나물 안 해 먹으면 죽는 줄 알았지."
옥분 할미의 산나물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울진사람들이 봄 산나물 중 으뜸으로 치는 미역취 등 취나물.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경북 울진 죽변항 봉개마을의 자연산 돌미역 건조작업.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햇닢이, 참나물, 잔대싹, 돌나물, 콩따대, 팥따대, 이밥추, 미역추, 대래몽둥이, 모시딱지, 종자나물, 각시나물, 머구, 개미추, 꼬까리, 무꾸나물, 묵밥디디기, 잉어대, 챔빗나물, 총각대, 지장나물, 고사리, 햇쑥, 달랑갱이...
옥분할미의 산나물에 대한 기억은 흡사 실꾸리처럼 끝도 없다.
1960년대 먹을거리가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을 넘어 온 노 할미들에게 산나물의 이름과 맛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봄날의 연정 같은, 아슴푸레한 추억 같은 것일 게다.
겨우내 아껴두었던 양식이 바닥을 보이는 봄 날, 마을 고샅길을 지나 한 마장거리의 산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은 산나물 천지였다.
갓 시집 온 새댁들은 아이를 두엇 둔 선배 새댁을 따라 산중을 헤매며 지천으로 돋아나는 산나물을 뜯었다.
새 봄에 가장 먼저 만나는 나물은 '햇닢이'였다. 화살나무에 돋는 새순이다.
화살나무는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이다.
전국 각지의 낮은 산에서 주로 자생한다.
줄기에 화살의 깃처럼 생긴 날개가 길게 나있어 화살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의 줄기 모양이 화살 날개처럼 생긴 특이한 모양 때문에 귀신을 쫓는다고 여겨 '귀전우(鬼箭羽)'라고도 부르며 또 참빗나무, 홋잎나무라고도 부른다.
'햇닢이'는 화살나무의 새 잎으로 대게 3월 초면 돋는다. 그러나 나물 중에서는 등급이 제일 낮은 층에 속한다. 타박타박하고 별다른 맛이나 향이 없기 때문이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울진의 사월은 산나물 세상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개두릅, 고사리, 머구나물 줄기, 머구나물.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 산나물도 등급매겨... 맛.향.식감.모양.저장성 등 정교한 기준
옥분할미는 지천으로 돋아나는 나물도 등급이 있다고 말한다.
할미들은 나물의 맛과 향, 식감, 모양, 저장성 등 꽤나 정교한 기준으로 등급을 매겼다.
가장 상급에 속하는 나물은 우선 맛과 향이 독특하고 뛰어난 것들이다.
이밥추, 원추리, 모시딱지, 참나물, 취나물, 잔대싹, 개두릅, 곤달래 따위이다.
또 표면에 털이 없이 반들반들하고 보드라운 질감을 가진 나물을 최상급의 나물로 여겼다. 맛이나 독특한 향이 없거나 묵나물로 만들지 못하는 나물은 별로 취급받지 못했다.
옥분할미는 맛과 향이 없는 나물들을 "풀 같은 맛"이라고 정의한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개두릅과 머구나물.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그 중에서도 참나물과 미역취, 곰취, 이밥추, 꼬갈추 등의 취나물과 개두릅, 쑥은 최상급으로 친다.
참나물과 취나물은 향이 좋아서 최고의 나물로, 이밥추와 모시딱지는 취나물에 비해 향은 덜하지만 표면이 반들반들하고 식감이 좋아 쌈을 싸먹기에 좋았기 때문에 할미들의 기억 속에는 최고의 나물로 자리 잡고 있다.
고사리는 깨끗한 나물로 여겨 잘 말려 놓았다가 환갑잔치나, 가장(家長)의 생일 등 집안의 큰일이나, 손님 접대 음식으로, 특히 제사 음식으로 주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당시 아낙들은 고사리를 뜯으면 바로 먹지 않고 잘 말려 묵나물로 활용했다.
나물을 맛과 향에 따라 등급을 매겼듯 나물마다 사용하는 양념의 활용도 다양했다. 맛과 향이 좋은 나물에 양념을 잘못하면 나물 본래의 향과 맛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나물마다 어울리는 양념을 사용했다.
최고의 나물로 취급받은 참나물과 취나물 따위는 갓 뜯어오면 무침으로 장만하는데 주로 다진 마늘과 생강에 참기름을 넣어 무쳐 먹었다.
매우 고급스런 산나물 레시피인 셈이다.
가시가 숭숭 돋은 엄나무의 새순인 개두릅은 그대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지만 할미들은 오래 두고 먹기 위해 고추장단지에 박아 '개두릅고추장장아찌'로 장만했다.
60년대를 살아 온 할미들에게 매 끼니를 장만하는 일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경북 울진지방의 봄철 산나물 밥상.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울진지방 식생활 문화의 거의 대부분은 60년대 먹을거리가 태부족하던 시절에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진지방 전통음식의 대표 격인 '고등어느리미'가 그렇고 '꾹죽'이 그렇고 '나물밥'이 그렇고 '쑥버무리'가 그렇다.
모두 제한된 식재료로 많은 식구들의 입을 고루 채워주기 위해 탄생한 '늘려 만든 먹거리'이다. 울진사람들은 '늘려 만든 먹거리'를 '느리미'라고 부른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경북 울진의 대표적 전통장시인 '바지게시장'의 봄날 풍경. 2024.04.22 nulcheon@newspim.com |
'늘려 만든 먹거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식재료가 산나물이다.
생선 한토막이든, 돼지고기 한 점이든 많은 식구들이 고르게 먹기 위해서는 양을 늘려야 하고 양을 늘리기 위해서는 봄철 지천으로 돋아나는 산나물을 제 때에 뜯어 갈무리해 말려 놓은 '묵나물'이 필수적인 식재료였다.
때문에 할미들은 새봄이면 앞 다투어 산으로 들로 나가 산나물을 뜯었다.
이렇게 마련된 산나물은 햇나물 무침으로 향긋한 밥상에 올랐고, 양식이 떨어지는 이듬해 봄철, 잘 말린 묵나물로 끓인 '나물느리미'로 식구들의 허기진 배를 따뜻하게 뎁혔다.
'느리미'라고 부르는 전통 먹거리에는 우리의 할미들이 정지 부뚜막에 앉아 그 많은 식솔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짜낸 삶의 지혜가 듬뿍 담겨 있는 셈이다.
nulcheo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