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에네 미술관 산티아고와 소피아 |
[뉴스핌=글 이현경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미술관은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이를 관람객에게 전시한다. 소장품은 미술기관의 자산이며, 작가에게는 기록이며 이력사항이다. 하지만,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고 예술 작품이라고 정의내리는 건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지는 일일까. 예술이 생산되고, 합법화되고 유통되는 제도적 방식에 문제의식을 가진 아르헨티나의 5인은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을 기획해 8년 째 운영하고 있다. 바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위치한 소규모 미술관 라에네(Laene)다. 큐레이터 3명, 작가 2명이 운영하고 있다.
라에네 미술관은 소장품을 디지털 아카이빙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실물로 소장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거나 혹은 작품의 매뉴얼을 디지털 파일로 보관한다. 이들의 소장품이 서울시립미술관에 공개됐다. 지난 12일 개막한 전시 ‘미래 과거를 위한 일’에 초청된 라에네 미술관 관계자 소피아 듀론(Soffia Dourron)과 산티아고 빌라누에바(Santiago Villanueva)와 마주했다.
라에네 미술관 대표로 참석한 소피아와 산티아고는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해외 전시에 여러 작가들과 함께 동등한 참여 자격을 얻은 자체가 라에네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소피아 듀론은 “그룹 전시에서 다른 작가와 함께 라에네 미술관이 초대된 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저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 이유는 저희의 활동 자체가 예술적 가치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라에네 미술관은 다른 참여 작가들과 동등하게 전시 공간을 받았어요. 라에네 미술관은 전시를 할 때마다 소장품을 재해석하고 재생산합니다. 이 자체가 저희가 생각하는 예술이고, 작품이에요. 그러니 저희의 콜렉션을 다양한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건 엄청난 일이죠. 또, 아르헨티나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진행하는 전시라 더욱 흥미로워요.”(소피아, 산티아고)
소피아와 산티에고는 라에네에게 특별한 전시가 된 ‘미래 과거를 위한 일’을 위해 작품을 더 추가했다. 추가된 작품은 총 세 개다. 니나 코벤스키의 ‘당신은 이렇다’와 레아 루블린의 ‘미술관의 안과 밖’, 오스발도 바고리아의 ‘국가 시’이다. 이렇게 세 소장품을 전시에 추가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니나 코벤스키의 ‘당신은 이렇다’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했어요. 그리고 ‘미술관의 안과 밖’은 물리적인 미술관에 대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추가했고요. 마지막으로 ‘국가 시’로 예술 저항 운동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어요. 정치적 발언이 예술을 작동시키는 것, 그리고 시와 미술의 경계는 없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소피아, 산티아고)
라에네 미술관의 소장품은 30여개 정도 된다. 2010년 라에네 미술관을 개관했고 2012년부터 콜렉션을 갖기로 결심했다. 예술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졌던 라에네 미술관. 소피아와 산티아고는 예술 작품을 실물로 소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소장품을 취하는 활동이 상당히 실험적인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레아 루블린 '미술관의 안과 밖', 펠리페 살렘 '거인' <사진=이현경 기자> |
“미술 관련 일을 하면서 미술관에서 소장품을 운영하고 관리하는데 문제점이 많다는 걸 알게됐어요. 그래서 운영체제에 대한 실험을 해보고 싶어 라에네 미술관을 설립했어요. 디지털 아카이빙을 하는 이유는 돈, 장소, 상황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소장품을 제대로 복원하고 관리할 수 없다면, 그리고 공간도 충분하지 않다면 디지털 파일로 소장하는 게 낫다는 게 저희의 판단이었죠.” (소피아)
디지털 아카이빙을 하는 라에네 미술관이 소유하고 있는 메모리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이에 소피아는 “1TB 외장 메모리 한 개가 다다. 넘버링은 안 해봤으나, 대략 30개 소장품이 있다”라고 말했다. 각자 클라우드 드라이브와 하드디스크, 그리고 작가가 모두 이 자료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라에네 미술관이 생각하는 예술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하니라, 상징을 서로 공유할 때 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만약, 디지털 시대가 오지 않아서 하드디스크에 저장을 할 수 없었다면, 이 정보를 모두 기억에다 뒀을 거예요. 전시가 있을 때마다 작가와 상의하고 작품을 재해석, 재생산하는 활동이 더 우선이니까요. 이번에 전시한 펠리페 살렘의 ‘거인’ 역시 이곳에서 재탄생된 작품이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벽돌 위에 신발을 올렸어요. 우리가 신고 걸어갈 수 있는 행동을 연장시킨 작업이죠. 전시가 열리는 곳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재료와 이야기로 작품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우리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작품이 가장 중요합니다.” (소피아)
이 같은 활동에 대한 소속 작가들의 만족도도 높다. 라에네 미술관은 처음부터 미술관 활동과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작업한다. 작가와 관계를 맺으면 작품을 재해석하고, 재생산하는 활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작가들과 일하기 때문에 한 번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라에네는 작품의 소유권이 있는게 아니에요. 공동 카피라이트를 가지고 있죠. 다시 말해 전시를 할 때 저희 미술관이 소개할 수 있는 권한이에요. 작가가 원한다면 언제든 저희의 권한을 가져갈 수 있어요.” (산티아고)
라에네 미술관은 공공미술관과 대안미술관 중간의 역할을 한다. 소피아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미술기관은 수도 적고, 혜택도 매우 열악한 상황. 더욱이,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도 미술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주도적인 움직임은 적은 편. 큐레이터 역시 소피아와 산티아고가 아르헨티나의 1세대 큐레이터다. 소피아는 서울에 다양한 미술기관과 프로그램이 잘되어 있어 놀랐다고 했다. 최근에야 젊은 미술가들의 활발한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고.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이 작가가 주체가 되어 설립했듯, 향후 젊은 작가들의 주도로 일어날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2년 전부터 아르헨티나에도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전시와 미술 활동이 전개되고 있어요. 아르헨티나는 작가들이 주체가 돼서 활동한 역사가 길어요. 19세기 후반에 1847년에 아르헨티나 국립 미술관을 건립한 것도 한 작가 덕분이었죠. 이것을 ‘DIY철학’이라고 하죠. 이와 같은 공간 운영의 방식이 오랫동안 존재해왔기 때문에 향후에도 미술계에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질 거로 기대해요.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미술 작품을 다양하게 향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 같아요.” (소피아, 산티아고)
[뉴스핌 Newspim] 글 이현경 기자(89hklee@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