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경 '나이없는 계절' 아트사이드 컨템포러리, 감각의 추상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흔히들 '서촌'이라 부르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아트사이드 갤러리가 지난 6일 두 건의 개인전을 개막했다. 권세진과 지선경 작가의 개인전이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감각의 언어로 '시간'과 '상태'를 탐구해온 작가다.

권세진은 '먹'과 한지라는 전통적인 재료로 깊게 침잠하는 풍경을 담은 작품을 아트사이드 갤러리에 풀어놓았다. 전시 타이틀은 '고요한 풍경'.
지선경은 지난 10년간 작업해온 감각적인 추상작품을 아트사이드 컨템포러리에서 선보인다. 지선경 개인전의 타이틀은 알쏭달쏭한 '나이 없는 계절'이다. 비동시적 시간의 흐름을 추상으로 담았기에 붙인 제목이다.
◆기억의 재현을 넘어 몰입의 상태 보여주는 권세진 '고요한 풍경'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권세진의 개인전 '고요한 풍경'은 작가가 오랜 시간 집중해온 '기억의 풍경'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질문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저 풍경일까, 나의 마음일까." 권세진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일이다.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다잡는 수행이기도 하다.
이번 개인전은 기억의 풍경에서 시작해 마침내 작가가 다다른 '시간이 고요히 응축된 세계'를 보여준다. 관람객은 작가가 마치 마음수련 하듯 차곡차곡 그려낸 깊고 맑은 회화의 바다로 빨려들게 된다.
전시의 시작인 1층에는 흑백의 작은 먹그림이 모여 거대한 수면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호수 위에 번져가는 파장과 물결 위로 흩어지는 아름다운 윤슬이 한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이 대형작업은 권세진이 감각한 자연의 배열과 움직임을 포착한 사진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가로 세로 10cm의 작은 한지 조각들이 모여 완성된 이번 대작은 본래 좁은 공간에서의 효율성 때문에 택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시간의 층을 물리적·개념적으로 해체해 화폭에서 다시 재조립하는 독특한 조형언어로 안착됐다.
아트사이드 1층과 지하를 잇는 공간에는 트로피를 그린 작품이 자리잡았다. 이는 작가의 기억 속 폐교가 된 학교의 유물이자 어린 시절의 상징물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개인의 기억을 보편적인 시간의 층위로 연결해주는 브릿지가 됐다. 이처럼 권세진에게 사물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이 압축돼 저장된 독립된 유니버스다. 그가 이번에 픽한 트로피는 그 감각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한 대상이다.
지하 전시장은 권세진이 천착해온 '기억'과 '시간'이 보다 넓고 깊게 확장된 공간이다. 흐릿한 기억의 풍경을 담은 'Memory Scape'연작을 필두로 신작 'Quiet Time' 연작이 나왔다. 작가는 인터넷 공간에서 출처도 맥락도 없이 떠밀려오는 '죽은 이미지(Dead Images)'들을 수집해 이를 화폭에 독특하게 그려낸다. 잉크젯 프린터의 CMYK 색상값을 토대로 대상을 정교하게 재현한 뒤, 그 위에 '흰 물감'을 덧칠해 이미지를 지워나간다. 이로써 선명함은 지우고 흐릿함을 덧입힘으로써, 오히려 소멸해가는 이미지들에 '몸'과 '시간'을 부여하고 있다. 관람객은 이 흐린 풍경 속에서 사라진 것과 다시 연결되고 싶은 미묘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권세진의 신작 'Quiet Time' 시리즈는 더욱 깊은 침잠으로 향한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 어둠 속에 놓인 꽃과 사물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있지만, 일상적 맥락에서 분리돼 초월적 세계처럼 다가온다. 이번 신작에 이르러 작가의 시선은 특정한 장소나 기억의 재현을 넘어, 하나의 '몰입의 상태'로 진입한다.
어둠과 빛만이 존재하는 화폭에서 대상들은 무엇을 상징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고요한 상태 그 자체로 머문다. 작가는 대상을 묘사하기 보다는 자신이 경험했던 고요와 명상의 상태, 즉 'Quiet Time'으로 관람객을 끌어당긴다.
결국 권세진의 회화는 얇은 종이 위에 쌓아 올린 시간의 두께이자,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며 만든 삶의 은유다. 빗방울의 파장에서 시작해 사물의 시간을 지나, 온전한 고요의 상태에 이르는 여정의 끝에서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기억의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감각의 추상…지선경 개인전 '나이없는 계절'
아트사이드 컨템포러리에서 막을 올린 지선경의 개인전 '나이없는 계절'은 독일에서 시작된 작가의 10년 작업궤적을 짚어보는 자리다.
알 듯 모를 듯한 전시제목 '나이없는 계절'은 통념적인 시간에서의 이탈을 선언하기 위해 명명됐다. 계절에 나이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셈법이자 달력의 법칙이라면, 작가가 말하는 '나이 없음'은 수치화된 시간에서 벗어나 '감각을 마주하겠다'는 의지다. 따라서 전시는 계절을 물성화하는 작가의 고유한 감각에서 출발한다.

지선경은 도시의 표면, 공기의 두께, 빛의 굴절 등 일상의 미세한 징후를 감각의 단위로 인식한다. 일반적인 추상이 대상을 끝없이 해체해 본질만 남기는 '소거'의 과정이라면, 지선경의 추상은 보이지 않는 감각의 시간을 물질화해 시각적으로 고정하는 '구축'의 과정이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색채와 같이 그 찰나적 현상은 작가의 작업을 거쳐 '독특하고 견고한 조형언어'로 치환됐다. 이는 단순한 현상의 재현이라기보다, 관람객의 시선과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상호작용을 통해 마무리된다.
지선경의 이번 실험은 독일에서의 조형작업 등 지난 10년의 과정을 돌아보며, 과거의 시간을 현재와 겹쳐보려는 시도에서 귀결되고 있다. 이는 계절이라는 감각의 '변화'로 은유된다.
작가는 일상에서 달라져가는 공기의 두께를, 미세하게 어긋난 나뭇잎의 방향을 인지하듯 서로 다른 층위가 포개지고 만나는 비동시성의 공간을 감각했다. 중첩된 시간 속에서 조금씩 흘러가며 변화하는 물체들의 균열은 지선경의 작품을 통해 독특하게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물질화하기 위해 작가는 에폭시를 겹겹이 적셔 그라데이션을 구축하고, 색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시각화하는 등 재료의 물성을 통해 시간의 층위를 끈질기고도 세련되게 조립해낸다.

지선경의 작업은 마치 우리가 지도에서 위도와 경도를 찍듯, 흐르는 시간 위에 감각의 좌표를 아로새기는 것과 같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조각으로 구현해낸 그의 작업은 스스로 정의한 바와 같이 '잔여적 추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작가는 관람객에게 시간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작업을 통해 구축된 '비동시적 시간'의 구조 안에서 각자 감각을 능동적으로 재배열해보기를 제안한다.
권세진, 지선경 작가의 작품전은 오는 3월 7일까지 계속된다. 무료관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