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범 전 국정원 차장, '경제 담화' 공개
2011년 김정일 장례 때 간부들과 만나
"남쪽 것 받지말라" 지시하자 지원 차단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1년 12월 노동당과 내각⋅군부 핵심 간부들에게 "남조선에서 보내온 쌀포대를 짊어지고 다니는 인민들이 노동당 만세를 부를 수 있겠느냐"며 대북 지원에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김정은 위원장은 또 "경제 관료가 제대로 일하려면 노동당에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개혁적인 정책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이 치러진 2011년 12월 28일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앞 광장에 도열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당시 직책)과 운구행렬. [사진=조선중앙통신] |
한기범 전 국가정보원 차장은 지난 7일 북한연구소(소장 김영수)가 주최한 '김정은 체제 12년, 변화와 전망' 학술회의에서 "2011년 12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을 마친 뒤 김정은 당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당정군 핵심 인사들과 만나 담화를 가졌다"며 발언 내용을 전했다.
한 전 차장에 따르면 김정은은 당시 간부들에게 "오늘 눈도 내리고 했는데 애썼다. 다들 장군님(김정일)을 떠나보내며 많이들 울고...참 고마운 우리 인민들이다"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 전 차장은 "당시 김정은의 담화 첫 화두가 북한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며 "대북지원 식량이 담긴 쌀포대를 주민들이 짊어지고 다니면서 북한 노동당에 고마운 마음을 갖기는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김대중 정부로부터 태국산 쌀 30만 톤 등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모두 240만 톤의 쌀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40kg짜리 포장으로 겉면에는 '대한민국'이란 글자가 새겨졌는데, 모두 6000만 포대 분량이다.
한 탈북자는 뉴스핌과의 통화에서 "포대가 워낙 튼튼해 곡물이나 물품을 담아 보관하거나 옮길 때 쓰이기도 했다"며 "주로 '대한민국'이란 글씨가 드러나지 않게 뒤집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북한연구소가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김정은 체제 12년 변화와 전망' 학술회의에서 한기범(왼쪽 둘째) 국정원 전 차장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수석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한 전 차장, 양운철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 김형석 대진대 교수,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 김택빈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사진=이영종 기자] 2023.06.07 yjlee@newspim.com |
한 전 차장은 "담화 내용으로 볼 때 적어도 김정은이 집권 초기 경제개혁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하지만 2012년 4월이후 위성 발사를 내세운 미사일 도발을 일삼고 최전방에 나와 '남조선을 수장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등 퇴행적 행보를 보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집권 초 석탄과 철광석의 국제시세가 좋아 수출로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고 시장에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건 긍정적인 요소였다"며 "하지만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북 제재와 코로나가 겹치면서 경제가 파국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기범 전 차장은 국정원 대북전략국 단장과 북한정보실장을 거친 대북 전문가로 이명박 정부 초기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대북담당 차장을 지냈다.
특히 김정은 집권 초기인 2013년 4월부터 3년 가까이 차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김정일 사망에서 김정은 권력 승계로 이어지는 과정의 북한 내부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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