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뛰어든 재야운동, 당적 옮겨가며 격랑의 정치생활 보내
정치생활 내내 강조한 '지역주의 타파', 전당대회서도 강조
[서울=뉴스핌] 이지현 기자 = 김부겸 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차기 당권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부겸 전 의원이 현재 대세론이 거론되고 있는 이낙연 의원에 비해 가진 비교우위는 '정치 여정의 스토리'다.
김 전 의원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대학에서 운동권 활동을 하면서 선봉에 나섰다. 역사의 굵직한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정치인으로서도 김 전 의원은 늘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대구 험지 출마를 자처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낙연 의원이 당대표 출마를 결정한 상황에서 김 전 의원은 대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책임 당대표'가 되겠다며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서울=뉴스핌] 최상수 기자 = 김부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당 대표 후보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2020.07.09 kilroy023@newspim.com |
◆일찌감치 뛰어든 재야운동…격랑의 정치 여정 거쳤다
김 전 의원은 1958년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56회)를 졸업한 뒤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진학과 동시에 첫 학기부터 학생운동에 발을 들인 그는 요주의 학생으로 지목되다가 재수 끝에 1976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김 전 의원은 서울대에서도 학생운동 선봉장에 섰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점거 유신 반대 시위사건,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 활동,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수 없이 공개 수배되고 구속되기를 반복했다. 학교를 제대로 졸업할 수도 없어 1987년 10여년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일찍이 재야 운동을 시작한 김 전 의원은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가입하기도 했는데, 이 조직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초대 의장을 맡고 이해찬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에는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치·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마다 중심에 서 있던 김 전 의원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인 것은 1988년이다. 당시 그는 '반지역주의 개혁정당'을 표방하는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91년부터는 김대중 총재의 민주당에서 본격적인 제도권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김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 대해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일러주셨다"고 회고하며 "전국에서 골고루 사랑받는 좋은 정당의 대표, 김대중 총재를 본받고 싶던 저의 오랜 꿈"이라고 언급했다.
김 전 의원의 정치 생활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1997년 조순 당시 서울시장과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의 연대로 한나라당에 합류한 그는 16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 때도 한나라당 소속 경기 군포 국회의원이었다.
하지만 성향이 달랐기에 김 전 의원은 한나라당 내에서 소장파의 역할을 담당했다.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와 함께 당 내 3040 신진개혁 정치인 그룹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창립했고, 개혁성향 의원들과 모임을 만들어 당 내부 개혁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개혁 작업에 당 내에서 김 전 의원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결국 한나라당을 탈당하게 된다.
[서울=뉴스핌] 최상수 기자 = 김부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당 대표 후보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뒷편에 의원실 보좌진 일동이 마련한 김 의원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피켓이 놓여 있다. 2020.07.09 kilroy023@newspim.com |
◆정치인생 내내 강조한 '지역주의 타파'
탈당 이후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연대'를 결성한 김 전 의원은 본격적으로 지역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걸고 정치 생활을 시작한다. 탈당 이후 그는 민주당 탈당파들과 힘을 모아 47석의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게 된다.
열린우리당에서 17대 총선 같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 전 의원은 당 내에서 홍보부대표, 원내수석부대표를 역임하며 18대 국회까지 무리없이 3선에 성공했다.
문제는 19대 총선이었다. 당시 김 전 의원은 기존 지역구인 경기 군포 대신 대구광역시 수성갑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지역주의의 벽은 높았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다만 40.4%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얻었고, 대구광역시장으로 출마했던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권영진 새누리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40.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김 전 의원이 이번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면서 "다음 대선에서 영남지역 40%의 표를 가져오겠다"고 자신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두 번의 고배 끝에 20대 총선 세 번째 도전은 성공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빅매치로 관심을 받은 당시 선거에서 김 전 의원은62.3%의 득표율로 김문수 후보(37.7%)를 큰 차이로 꺾고 4년만에 국회에 복귀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임명된 김 전 의원은 그간의 신념대로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넘겨주는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을 중점적으로 추진한 바 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도 김 전 의원의 비장의 카드는 '지역'이었다. 민주당에서 보기 드문 영남권 정치인으로서 김 전 의원은 대선을 승리로 이끌 인물이 자신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저 김부겸은 꽃가마 타는 당 대표가 아니라 땀 흘려 노 젓는 '책임 당 대표'가 되겠다"며 "호남을 싣고 영남을 싣고 대한민국 모두를 책임지는 민주당의 선장이 되겠다. 광주 금남로, 대구 동성로, 부산 남포동을 하나로 잇겠다"고 강조했다.
jh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