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1967년 이탈리아 미술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1940~)는 나뭇가지, 모래, 시멘트, 소금, 밧줄 등 지극히 일상적인 재료로 자연과 초자연, 언어와 역사를 성찰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라는 용어로 지칭했다. ‘위대한 조각’의 총아였던 대리석과 청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인간과 밀착된 ‘별 것 아닌 물질들’로 자연과 인간의 상관성을 풀어냈던 이 사조는 이탈리아에 국한되지 않고 독일의 요셉 보이스와 한스 헤케, 미국의 에베 헤세 같은 작가들로 뻗어가며 국제성을 띄기 시작했다.
이후 ‘아르테 포베라’는 서구의 기득권 문화로부터 소외된 주변부 문화와 제3세계를 폭넓게 대변했고 시대와 다각도로 호흡해왔다. 일련의 작업은 때론 급진적으로 흐르기도 했으나 대중들은 매스, 힘이 전하는 긴장을 감각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서구에 ‘아르테 포베라’가 있다면 한국에는 조각가 정현(1956~ 홍익대 교수)이 그와는 또다른 결을 갖고 끈질기게 작업 중이다. 정현은 낡고 버려진 물질에 응축돼 있는 힘과 시간에 주목한다. 이를 조각으로 환원함으로써 물질에 깃든 에너지와 시간성을 드러낸다. 특히 억눌린 것, 견뎌온 것들에 담긴 에너지를 진득한 덩어리로, 또는 강렬한 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현, 〈무제 Untitled〉, 2018, 나무에 먹물 착색, 280x335x335cm [사진=금호미술관/촬영 김민곤] |
정현의 묵직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작업세계를 음미할 수 있는 작품전이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관장 박강자)에서 열리고 있다. 금호미술관은 2001년 이후 17년 만에 정현의 초대전을 마련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지난 2016년 프랑스 파리의 ‘심장’과도 같은 장소인 팔레 루아얄 정원과 생 클루 국립공원에서 열린 대규모 설치미술전 이후 국내 첫 개인전이자 일종의 보고전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작가는 이번에 낡은 한옥을 철거하며 나온 목재 잔해와 경남의 한 서원에서 퇴출(?)된 거대한 대들보로 신작을 제작했다. 또 파리 전시를 위해 2015년에 다시 만든 침목작업과 대규모 콜타르 드로잉, 기존 작품 중 주요작, 미공개 작품 등 총 3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홍익대 미대, 대학원을 나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거치며 제도권 교육을 받았지만 정현은 어쩐 일인지 고급스런 재료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대신 철로 침목(枕木), 용도를 다한 목전주, 석탄, 아스팔트 콘크리트, 잡석 같은 험난(?)한 산업폐기물에 애착을 갖는다. 스스로를 ‘잡식성’이라 칭하는 작가는 팍팍한 현대사회에서 오랜 소임을 다하고 버려진 물질들을 작업에 끌어들이며 우리 앞에 ‘견딤의 미학’을 풀어 보인다.
금호미술관의 이번 ‘정현(Chung Hyun)’전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1층의 대들보다. 경남의 한 서원에서 나온 이 대들보는 흰 개미가 파먹은 구멍들로 더 이상 하중을 버티지 못하게 되자 용도 파기됐다. 정현은 오랜 세월 건축물의 일부로 무게를 견뎠던 육중한 대들보를 ‘조각적 물질’로 주목하고,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천정에서 시간을 지탱했던 대들보는 이제 땅에 내려와 다시 터를 잡았다. 작가는 단청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대들보의 틈에 수직의 검은 목재들을 꽂아 버려졌던 나무들이 하늘로 솟아오르게 했다.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상승이다.
정현, 〈무제 Untitled〉, 2018, 나무에 먹물 착색, 230x1100x75cm(부분) [사진=금호미술관/촬영 김민곤] |
2층에는 이번 전시의 주재료인 폐한옥 잔해들이 작품이 됐다. 가옥의 일부였던 목재들은 철거 과정에서 힘 없이 부러지고 찢기며 기묘하게 날 선 형태를 갖게 됐다. 정현은 백년 가까운 시간동안 인간의 신산스런 삶과 기억을 함께 해온 폐목을 증기로 찌고, 검은 물감을 입혀 토템처럼 쌓아올렸다. 단단한 원을 그리며 켜켜이 쌓여진 검푸른 목재들에선 신랄한 구축미가 느껴진다. 또 2층의 안쪽 전시장에는 삐쭉삐쭉한 폐목들이 파도처럼, 물결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너른 전시장을 대각으로 가르며 묵직한 선 드로잉으로 이어지는 목재더미는 공간 전체에 예리한 파장을 퍼뜨린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정현의 새로운 공간작업이다.
이들 폐목재 설치작업은 미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억눌림 속에서 ‘해방’의 에너지를 건져올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견고하고, 웅숭깊은 아름다움이다. 작가는 형식주의에 함몰되지도, 현실에 지나치게 개입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지나온 시간들을 담담히 응시하며 쌓기와 늘어놓기를 시도했다. 물질과 정신이 긴장감있게 교차하고, 상승하는 그의 이번 작업은 감상자들을 성찰과 사유의 장으로 조용히 이끈다.
3층 전시실에는 콜타르를 재료로 한 5~6m 길이의 대형 드로잉이 내걸렸다. 정현의 콜타르 드로잉은 산업적 재료의 물성을 살리며 그 본질과 핵심을 드러낸다. 작가는 “아스팔트 재료로 쓰이는 콜타르는 석유제조 과정의 마지막 찌꺼기죠. 쓸모없는 것 같지만 오히려 기층적인 느낌을 받지요. 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쓸모있는 것임을 표현하고 싶어집니다”라고 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침목에 이어 콜타르 역시 재료의 물질성 뿐 아니라 정신성 또한 그가 추구하는 세계와 맞아떨어짐을 강렬한 드로잉들은 말해준다.
미술관측은 작가 정현과 미술평론가 심상용이 갖는 ‘작가와의 대화’를 오는 19일 오후 3시에 개최한다. 정현의 작업에 관심이 있는 일반이나 미술전공자는 누구든 이 대담에 참여할 수 있다. 전시는 5월22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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