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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마리아 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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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4)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개막식 때 아테네 주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장내는 잠시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My Life is My Work. My Work is My Life.” 라 말했던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 가수가 될 거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마리아 칼라스를 두고 흔히들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오페라의 여신', '오페라의 처음과 끝'이라고들 부른다.
오페라에서 소프라노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어서 ‘무대의 꽃’, ‘디바(Diva, 여신)’라고들 한다. 음악계에서는 소프라노의 역사를 마리아 칼라스의 전과 후(B.C, Before Callas)로 나누어 비교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그녀에 견줄 만한 소프라노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힘찬 소프라노부터 어슴푸레한 메조소프라노까지를 소화하는 풍부하고 다양한 음색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 소프라노들이 고음으로 갈수록 소리가 작아지는 반면, 마리아 칼라스의 극 고음은 중저음 못지않은 성량으로 관객들의 심금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녀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음악 속에 숨겨진 미묘한 드라마와 감정과 성격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놀라운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근성도 강했다. 서른 살 무렵 2년 사이에 한때 95㎏에 달하던 체중을 30㎏이나 감량하면서 외모까지 완벽한 여신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 등 전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서 여신처럼 군림하게 된 후 평론가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두고 “낯선 은하계에서 길을 잃은 별 같다.”고 말했다. 천부적으로 맑고 고운 목소리를 타고난 소프라노가 아니면서도 감정을 담은 목소리와 풍요로운 연기력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당대의 어떤 가수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개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칼라스를 '오페라의 여신'으로 불리게 한 대표적인 배역은 벨리니의 《노르마(Norma)》와 푸치니의 《토스카(Tosca)》에서의 주연 역할이었다. 그러나 칼라스에게 최고의 영예와 명성을 안겨 준 이 배역의 여주인공들이 극 중에서 겪었던 불행한 사건은 바로 칼라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났다. 사랑하는 남자의 배신, 그리고 사랑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특히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가사는 마치 칼라스의 생애를 요약한 듯하다. 노래로 세상을 얻었지만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파멸과 죽음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1923년 태어나 1977년 5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 그녀는 1923년 12월 2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13세까지의 소녀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본명은 마리아 칼로예로풀루(Maria Kalogeropoulos)였다. 어린 시절 뚱뚱한 외모와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주위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십대 소녀 칼라스는 오로지 한 곳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칼라스의 어머니는 1937년 그녀를 데리고 고국인 그리스 아테네로 돌아간다. 여기서 그녀의 인생을 결정해준 스승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난다. 그는 칼라스에게 성악의 기본 창법과 철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의 매너와 기교까지도 가르쳤다.
1940년 11월 칼라스는 그리스 아테네 국립오페라극장에 데뷔해 일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뉴욕에서 배역을 얻어 보려던 노력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47년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 베로나 페스티벌에서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주인공 조콘다 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만난 지 5분 만에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칼라스는 회고했다. 세련됨과 교양 그리고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오십대 초반의 사업가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스물여섯 살의 칼라스는 28세 연상인 메네기니와 결혼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칼라스의 시대가 열렸다.
《라 조콘다》는 칼라스와 메네기니에겐 운명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녀가 이탈리아의 무대에 처음 출연한 것이 이 오페라였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튼 것도 바로 이 오페라의 리허설 때였다. 그리고 그녀가 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을 때도 역시 《라 조콘다》를 레코딩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칼라스가 죽음을 앞두고 쪽지에 남긴 글귀도 《라 조콘다》였다. 자살을 결심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 주는 오페라 속의 아리아 가사는 현실에서도 그녀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 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1950년으로 접어들면서 그녀에게 성악가로서의 행운이 뜻밖에 찾아들었다. 칼라스는 병이 난 레나타 테발디의 대타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입성해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배역은 오페라 《아이다》에서의 주연 ‘아이다’ 역이었다.
당시 테발디는 ‘라 스칼라’극장의 여왕이었다. 그런데 테발디에게 예기치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아이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극장 측은 서둘러 대역을 쓰기로 했다. 테발디의 대타로 등장한 가수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였다. 칼라스는 당시 아직도 무명이었고, 거칠고 모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다’의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목소리에 넋이 나간 관객들은 열광했다. 작가 헤밍웨이는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이라고 칭송했고, 공연을 본 관객마다 ‘새로운 디바가 등장했다’며 환호했다.

단 한 번의 공연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칼라스는 곧바로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오페라 팬들은 ‘마리아 칼라스 파’와 ‘레나타 테발디 파’로 갈리기 시작했다. 라 스칼라 극장은 칼라스와 전속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1951년 스칼라극장의 브라질 공연에서 대스타였던 레나타 테발디는 신인인 마리아 칼라스와 한 무대에서 교대로 노래를 불러야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테발디는 공연 전 자신이 먼저 나서 동료들에게 앙코르를 받지 말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정작 무대에서는 자신만이 앙코르 곡을 불렀다. 당연히 테발디가 칼라스를 위시한 전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한번은 《라 트라비아타》 공연에서 테발디가 키를 반음 낮춰 부르자, 마리아 칼라스는 시사 주간지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테발디를 비교하는 것은 샴페인과 김빠진 콜라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언행과 갈등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 신문에 좋은 가십거리로 보도되었다.
1953년, 3일 간격으로 테발디가 출연하는 《라 발리(La Wally)》와 마리아 칼라스의 《메데아(Médée)》 공연이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리게 되면서, 누가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지가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결과는 칼라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칼라스의 공연은 표가 매진됐으나 테발디의 표는 조금 남아 있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칼라스는 테발디를 밀쳐내고 1인자 자리에 등극한다. 이후 테발디는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둘은 라이벌로서 경쟁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음악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관객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페라 토스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디바, 마리아 칼라스 <사진=이철환>

한편, 칼라스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면서 점차 극장과 지휘자와의 마찰이 잦아지게 되었다. 결국 1947년부터 시작한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는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Opera di Roma) 극장에서 이탈리아 대통령 조반니 그론키 앞에서 《노르마》를 공연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몸이 좋지 않았다. 결국 약을 먹고 공연하였으나, 통증과 약기운으로 인해 도중에 공연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탈리아의 청중들은 그녀를 맹비난했고, 이 일로 칼라스는 극장 측과 격렬히 싸운 후 극장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서도 잠시 동안 몸담아 있기도 했으나, 이 역시 극장 측과의 불화로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1958년 12월 19일 파리에서 가진 갈라 콘서트에서 칼라스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이때 청중 속에 있던 오나시스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이 내린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는 그의 예술적 명성과는 달리 사랑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운명적인 여인이었다. 1950~60년대에 오페라 계를 풍미하던 그녀였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그리 순탄치 못하였다. 칼라스에게는 자신 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첫 번째 남자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사업가 메네기니였다. 그는 칼라스의 첫 남편이자 매니저로서 그녀를 세계 오페라 무대에 당당히 등장시킨 인물이었다. 칼라스는 1947년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만난 28년 연상의 메네기니와 동거하다가 곧 결혼하였다. 이후 남편 메네기기가 그녀의 음반과 각종 활동비용을 후원하였기에 칼라스는 노래와 오페라에만 전념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남자는 대지휘자였던 툴리오 세란핀이었다. 그는 칼라스에게 오페라 가수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세라핀과 함께한 칼라스는 한 시즌에 바그너 《발퀴레》의 브륀힐데 역과 벨리니 《청교도》의 엘비라 역을 동시에 불러 이탈리아 오페라 계를 들끓게 했다. 어떤 소프라노도 이처럼 성격이 다른 배역을 며칠 사이에 완벽하게 바꿔가며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남자는 세계적인 거부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였다. 칼라스에게 오나시스의 만남은 그녀의 비극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칼라스가 오나시스와 첫 만남을 가졌을 당시 메네기니와는 여전히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나시스의 초대로 두 사람은 오나시스의 요트를 타고 함께 여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이 요트 여행이 끝날 즈음에 오나시스와 칼라스는 묘한 관계로 발전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화목했던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
칼라스는 남편이자 후원자였던 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와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0년 초에는 오나시스를 따라 상류사회의 생활과 사교계에 다니는 가운데 작품 활동이 뜸하였다.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이혼 후 오나시스와 결혼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57년 칼라스는 메네기니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하였다.
오나시스는 칼라스를 철저하게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들게 만들었다.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오나시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고, 자신의 연주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스케줄에 더 몰두하며 지냈다.
칼라스는 그야말로 몇 년간을 상류사회의 향락에 빠져 지냈다. 몇몇 사람들이 그녀에게 간곡히 충고하여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했지만, 온통 오나시스 한사람 생각으로만 채워져 있던 칼라스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오나시스를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핑크빛 꿈에 졌어 있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결혼을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으로 변경하면서까지 사랑했던 오나시스가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재혼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칼라스는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였다. 그의 목소리에도 이상이 생겼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공연취소가 연이어졌고 그에 따른 관객들의 비난이 쇄도하였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그녀는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황폐해져 버리게 되었다. 목소리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지 않았고 연주에 대한 열정 또한 사리진 지 오래였다. 칼라스는 1965년 영국 코벤트 가든에서 열린 《토스카》 공연에서의 ‘토스카’역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세월이 다 가버렸음을 알아차린 칼라스는 프랑스로 건너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파리에서 조용한 삶을 살아가던 중 197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절친한 친구인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순회공연을 떠나보았다. 그러나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육체적으로 무리한 공연일정을 마친 얼마 후 마리아 칼라스는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을 철저하게 배신했지만 마지막까지 그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던 오나시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이 소식은 칼라스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지내다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인 1977년 9월 16일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칼라스는 고독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했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메네기니의 친구에게 메네기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친구는 메네기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칼라스를 다시 만나볼 것을 종용했으나 메네기니는 “떠난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돌아와야 한다”며 먼저 손 내미는 것을 거절했다.
이 시대 최고 오페라 디바의 쓸쓸한 임종을 마지막까지 지켜 본 사람은 오로지 그녀의 간호사와 집사뿐이었다. 한때 자살설이 돌기도 했다. 극심한 고독에 의한 자살이라는 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죽기 얼마 전 이런 얘기를 남겼다. “지금까지 노래를 사랑해 왔지만, 나에게 남는 건 사랑밖에 없더라!”

수많은 비극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미스터리 속에 이 세상을 떠나간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살아생전 사랑했던 그리스 앞바다 에게 해에 뿌려졌다. 그 때 그녀 나이 54세였다. 이제 그녀는 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남아 지금도 온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특별한 감동으로 적시고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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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업무보고 논란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청와대 영빈관에서 5일 열린 외교·안보 분야 정부 부처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과 업무보고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날 정 장관의 발언 중에는 정부 내 조율을 거치지 않은 사안을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것이 있는가 하면 사실 관계에 맞지 않은 설명도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신중을 기해 달라고 경고했고,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상주의적 희망에 근거한 비현실적 구상'이라는 비판을 내놨다. 그동안 정 장관의 대북 정책 관련 발언이 물의를 빚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대통령과 유관 부처 장관이 공개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 장관의 무리한 대북 접근법과 월권을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2026.07.23 ◆통일부 장관 권한 넘어선 주장 정 장관은 이날 업무보고에서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을 설명하면서 이재명 정부 2년차 핵심 과제로 상호 존중·평화적 갈등 해결·핵 없는 한반도 등 3대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정 장관은 "대결과 혐오의 언어는 멈춰야 한다"면서 주적 용어 대체를 주장했다. 지난 25년간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구도는 이미 무너졌다고도 했다. 또 "현 시점에서 흘러간 선(先)비핵화만 되뇌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데 힘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 장관은 또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는 논의에 착수하겠다"면서 "북·미 정상회담 견인과 함께 4자 대화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정 장관의 구상에 대부분 제동을 걸었다. 이 대통령은 "평화공존 정책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측면이 있다"며 "많이 조심하셔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는 "표현에 꼬투리가 잡혀 정쟁으로 휘몰아 들어가면 원래 하고자 했던 데에서 오히려 나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의 선의대로 하는 게 과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플러스냐, 결론적으로 약간의 의문이 들 때도 있다"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업무보고 사후 브리핑에서 정 장관이 언급한 '4자 회담'에 대해 "이상주의에 근거한 어떤 희망이라 하더라도 그건 아직 조율되지 않은 방법"이라며 "여러분들께서 디스카운트해 주시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정 장관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EEF)'을 언급하며 "정부 차원에서 (참석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한 데 대해서도 조 장관은 "그것은 외교부의 몫"이라며 "아직 거기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잘랐다. 정 장관이 이날 소개한 대북 구상과 설명은 정부 내 조율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주적 표현 대체와 국호 사용, 9·19 군사합의 복원, 4자회담 추진 등은 통일부 장관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어서 월권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정 장관의 업무보고를 듣고 난 뒤 "여기 업무보고에 발표했다고 승인난 건 아니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정 장관의 발언 내용은 대부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 아닌 정 장관의 개인적 생각에 가깝다"며 "안보 관련 부처 장관이 정부의 공식 정책이 아닌 사안을 추진하겠다고 업무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면전에서 '국군통수권자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통일 외교 국방 등 외교 안보 부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2026.08.05 ◆시대착오적 접근, 대북 인식 오류 더욱 문제인 것은 정 장관의 이같은 주장이 현 시점에서 이미 참고가 될 수 없는 과거의 경험 또는 사실과 다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장관이 주장하는 구상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북한의 전략과 한반도 및 국제 정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 장관이 "흘러간 선(先)비핵화만 되뇌는 것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언급한 것은 지금까지의 대북 접근법을 호도하고 있다. 북핵 위기 발발 이후 지금까지 모든 핵 협상에서 한국이나 미국은 북한에 선비핵화를 공식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북핵 협상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한·미가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는 핵시설 동결과 중유 제공의 교환이었다. 2005년 9.19 공동성명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의 모든 단계에 상응조치를 제공하는 '행동 대 행동' 원칙이 적용됐다. 대북 협상에 관여했던 한 전직 관료는 "모든 북핵 협상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한·미가 제공하는 상응조치를 어떻게 정교하게 배열하느냐가 관건이었다"면서 "정 장관의 발언은 지금까지 한·미가 북한에 먼저 핵을 포기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정책을 고수해 현 상황에 이르게 됐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장관이 "지난 25년간의 CVID 구도가 무너졌다"고 말한 것도 비핵화의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어떤 명칭을 붙이든 핵을 제거한 뒤 이를 검증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하는 것은 비핵화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기본적 절차"라며 "CVID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검증도 하지 않고 언제든 되돌릴 수 있도록 합의하자는 말과 같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 조현 외교부 장관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2026년 하반기 업무보고 사후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6.08.05 gdlee@newspim.com ◆안보 리스크 키우는 통일부 장관 정 장관은 지난해 취임 직후부터 청와대와 외교부를 제치고 통일부가 북한과 관련된 모든 정책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단독 질주를 거듭해왔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을 변형한 '평화적 두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외교부가 미국과 북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에 대해 "한반도 정책과 남북관계는 주권의 영역이며 동맹국과 협의의 주체는 통일부"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미 워킹그룹이 남북관계 파탄 원인이었다고 사실과 다른 주장을 폈다. 지난해 업무보고에서는 국제정세를 감안하지 않고 남북대화 재개에만 초점을 맞춘 비현실적 내용으로 논란을 빚었다. 정부 내 조율도 거치지 않고 독자 대북제재인 5·24 조치를 해제하고 9·19 군사합의 비행금지구역 복원을 추진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지난 4월에는 평안북도 구성시에 우라늄 농축 시설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은 이 발언을 계기로 한국과 대북정보 공유를 제한했다. 이 조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장관이 이처럼 정부의 공식 결정을 거치지 않은 사안을 정부 정책인 것처럼 주장하며 좌충우돌하는 배경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북한 문제에서 조기에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조급증과 자신의 존재감 과시 욕구가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일각에서는 정 장관이 2007년 민주당 대선후보였을 때 이재명 대통령이 캠프에서 비서실 부실장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는 것을 들어 "정 장관이 아직도 이 대통령을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내놓기도 한다. 한·미 관계와 북한 문제를 오래 다뤘던 전직 관료 출신의 한 전문가는 "정 장관 취임 후 지금까지의 언행은 잘못된 현실 인식에 따른 독단과 앞서 가기, 월권 등으로 점철돼 있다"면서 "통일부 장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스스로 안보 리스크를 키우는 역할만 했다"고 비판했다. opento@newspim.com 2026-08-0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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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경상수지 최대 흑자 [서울=뉴스핌] 박가연 기자 = 지난 6월 우리나라의 경상수지가 전월에 이어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IT) 품목 수출 호조로 월간 상품수출이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선 영향이다. [자료=한국은행] 한국은행이 6일 발표한 '2026년 6월 국제수지(잠정)'에 따르면 지난 6월 경상수지는 497억3000만달러 흑자로 집계됐다. 전월(386억1000만달러)에 이어 두 달 연속 월간 기준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에 따라 올해 상반기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1910억1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경상수지 흑자를 견인한 것은 상품수지다. 6월 상품수지는 478억9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전월에 이어 역대 최대를 다시 썼다. 국제수지 기준 상품수출은 1123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84.5% 증가하며 월간 기준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상품수입은 644억8000만달러로 38.6% 늘었다. 통관 기준으로는 반도체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196.9% 급증했고 컴퓨터·주변기기(SSD)는 282.7% 증가했다. IT 품목 수출은 160.4% 늘었으며 비IT 품목도 ▲석유제품(47.5%) ▲화공품(18.6%) ▲철강제품(17.9%) ▲승용차(6.1%) 등을 중심으로 18.6% 증가했다. 통관 기준 수입은 ▲원자재(30.5%) ▲자본재(35.3%) ▲소비재(16.4%)가 모두 늘었다. 서비스수지는 12억9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해 전월(-10억9000만달러)보다 적자 폭이 확대됐다. 여행수지는 외국인 입국자 증가와 유류할증료 인상 등에 따른 출국자 감소로 4억4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했지만 지식재산권사용료수지는 전월 흑자에서 4억4000만달러 적자로 전환됐다. 본원소득수지는 배당소득을 중심으로 32억7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해 전월(21억7000만달러)보다 흑자 폭이 확대됐다. 배당소득수지는 배당수입이 늘어난 데다 전월 분기배당에 따른 기저효과로 배당지급이 줄면서 25억6000만달러 흑자를 나타냈다. 금융계정 순자산은 6월 중 467억1000만달러 증가해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종전 최대였던 올해 3월(369억9000만달러)을 넘어선 것이다. 직접투자에서는 내국인의 해외투자가 80억1000만달러, 외국인의 국내투자가 46억3000만달러 각각 증가했다. 증권투자에서는 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도세가 이어졌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투자는 차익실현 매도 등의 영향으로 316억1000만달러 감소하며 전월(-310억5000만달러)에 이어 역대 최대 순매도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는 세계국채지수(WGBI) 자금 유입에도 분기 말 만기도래 영향으로 증가 폭이 줄어든 52억9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내국인의 해외 증권투자는 주식을 중심으로 35억6000만달러 증가했다. eoyn2@newspim.com 2026-08-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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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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