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어릴 때 살던 집의 사진을 꺼내 본다.
그리 넓지도 않고 아주 오래 되어 볼품 없는 한옥. 빈 집으로 폐가마저 되어 있지만 지구상에 있어온 모든 집 중에 내겐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다운 집이다.
신식으로 바뀌기 전의 재래식 부엌엔 아궁이가 있었다. 그 안엔 구닥다리 레일이 깔려 연탄이 담긴 도구를 운반했다. 어머니의 애환과 소망도 함께 버무려졌다.
부뚜막에 놓인 검은 솥단지엔 검댕이 붙어 있었다. 그것이 검은 보석인 줄을, 흑연, 다이아몬드, 그래핀과 같은 로얄 패밀리라는 사실을 어릴 땐 알지 못했다.
마당의 장독대엔 항아리가 있었다. 된장과 간장이 익어갔을 것이다. 냄새가 고약했는데 내가 장성해서는 발효의 내음으로 그보다 좋은 것이 없어 보였다.
부엌의 벽에 걸린 소쿠리를 형이 걷어와 마당에 내놓은 날도 있었다. 창고에서 나무 토막을 꺼내오고 안방에서 긴 끈을 구해왔다. 그걸로 나무 토막을 묶었다. 그 막대기를 소쿠리 안에 그것을 받치며 놓아두었다. 끈의 끝을 움켜쥐고 참새가 날아와도 보이지 않게금 마루 깊숙이 몸을 숨겼다. 밥을 안치고 마루를 닦던 식구들은 그 풍경을 보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딱지 치기, 구슬 놀이 등 노는 일이 직업인 나 역시 색다른 호기심이 일어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참새는 형보다 영리했다.
안방엔 공작새가 수놓인 커다란 천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에 손수 짠 것이다. 아버지가 아끼는 그 부친의 작은 유품. 실크로드의 이미지로 내게 부각된 그것도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성냥, 싸구려 망원경, <안데르센 동화집>, <그리이스 로마 신화>, 카프카의 소설, 실, 뜨개질 바늘, 골무, 비녀, 대야, 밥상, 두꺼비집, 망치, 대패도 그 집에 있었다.
또 있었다. 마당엔 수채가 흘렀는데 그 곁에 숫돌이 있었다. 부엌에 걸려 있던 칼들이나 마루 위의 가위는 그 검은 돌에 갈려 날카로와졌다. 칼이나 가위로서의 생명력이 살아난 것이다. 그만큼 숫돌은 닳아졌다.
제 몸을 허물고 비워 다른 사물들을 빛나게 해주어서 그런지 작고 볼품 없는 숫돌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그 자리에 붙어있는 듯했다.
산책에 나서서 걷다보니 어느 집 창에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의 조화 속에 네모난 창틀이 문득 천원지방의 ‘방’의 형상으로 보였다,
유리창은 말라르메의 시에도 나오듯 비상이며 자유이자 하늘을 상징한다. 그 유리창의 틀이 땅의 형상이라는 이 순간의 발견 하나만으로도 내 가슴은 뛴다.
그러고 보니 숫돌도 천원지방의 ‘방’ 모양이다.
숫돌이 마당에서 내 눈을 유독 끌었다면 안방에서는 벼루라고 할 수 있겠다. 붓과 먹, 선지와 함께 문방사우에 속하는 벼루. 그것은 숫돌과 왠지 닮은 점이 있어 보인다.
둘 모두 자기 몸을 허물고 비워 다른 것을 빛나게 하는 도구로 쓰여서인 것 같다. 먹이 갈릴 때 벼루 또한 조금씩 갈려 네모난 허(虛)의 바닥이 둥그렇게 패여나간다. 그곳에 먹물이 특히 진하게 고여 붓에 스며드는 것이다.
벼루는 천원지방의 ‘방’ 형상을 바탕으로 ‘원’의 형상도 빚는 셈이다. 원래는 네모난 형태인데 먹과 더불어 갈리다보니 ‘원’ 즉 하늘 형상마저 지니게 되면서 그 안에 고이는 먹물이 붓에 의해 글이나 그림으로 화하는 것이다.
네모난 창틀에 끼여진 유리창에 햇빛이 하늘의 그림을 그리는 것과 흡사하다고 한다면 궤변이며 억지일 뿐인가.
그렇게 보아도 상관없다.
내겐 지금 그런 상상이 유리창에 투영되면서 내가 사는 셋집 역시 문득 좀더 소중해지는 것이다.
마당이 없어서도 그럴 것이다. 마당이 없기에 화단도 없고 흙도 없고 꽃도 없다. 수채 옆에 놓여 있던 숫돌도 없다. 결여 때문인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 존재가 떠올랐었는데 벼루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며 그 둘이 유리창에 덧씌워진 것이다.
세상엔 집이 없는 사람, 집은 있으나 나라가 없는 사람, 집도 나라도 없는 사람, 나라도 집도 있었으나 둘 다 빼앗기고 자기 집이던 바로 그곳에서 노예로 전락한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버젓한 고향의 집을 두고 난민의 신세가 되어 이국의 난민촌에서 냄새 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탈출 과정에서 목숨처럼 아끼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영혼을 짓누르는 사람들도 많다. 세상의 참담한 비극들 앞에서 나 정도의 궁핍은 오히려 송구할 뿐이고 그에 대한 상상의 덧칠도 가벼운 일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수저, 싱크대, 보일러 조절 장치, 머그컵, 안방문, 스위치, 거울 등등은 모두 자그마한 안식처로서의 내 셋집 안의 물건들이다.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하나하나 새롭게 변모했고 더욱 소중하고 따스하게 와닿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 자체로 풍성함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하나엔 내가 미처 담지 못한 깊이들이 머금어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다른 어느 걸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인 사람들이 사는 집. 그것 역시 탐욕, 이기심의 집이 아니라 소유 이상의 존재의 집이기를 바래 본다.
유리창이 큰 나의 셋집 안엔 작은 앉은뱅이 탁자가 있다. 노트북도 놓여 있고 볼펜도 놓여 있다.
숫돌이 제 몸을 허물고 비워 다른 존재들을 빛나게 하듯 볼펜 역시 그런 면도 있어 보인다. 노트북은 볼펜이자 종이이다. 붓이자 선지이기도 하다. 내 가슴 속의 먹과 벼루를 더욱 갈아 진한 먹물이 둥근 바닥에 잘 고이도록 해야겠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