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지금은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성냥이 중요한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없던 그 이전의 시절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불씨를 부싯돌을 부딪혀 구하거나 궁궐에서 전달받곤 하던 세월이 길었다.
그런 성냥이 어릴 적 부엌에 놓인 곤로에 불을 붙일 때 사용되었다. 성냥알을 성냥갑의 마찰면에 휙 그을 때 빨갛게 피어나던 불꽃이 신기했다. 딱성냥은 아무 데나 휘익 그어도 불이 붙었는데 어쩌면 내게 강렬하게 인지된 최초의 차별화일 수도 있겠다.
언뜻 보면 너무도 단순한데도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성냥이라는 존재이다. 나무를 잘게 잘라 잔 토막을 낸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발상이다.
화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이 유럽으로 건너온다. 그런 지적 기반 위에 성냥에 대한 아이디어가 싹트게 된다. 들고 다니면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불은 일상 생활에서나 캠핑, 낛시 같은 취미 생활, 흡연 등등에 절실히 요구되었다.
발명품치곤 너무도 단순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는 성냥에서 내가 스마트폰의 전형을 발견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도리어 우스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말한다. 말할 수 있다. 성냥은 당시에 일종의 스마트폰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스마트폰의 의미를 일축하면 종합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까지 발명된 컴퓨터, 전화, 이메일, 티브이, 카메라, GPS, mp3 등등 무수한 기능의 산물들을 손바닥만한 용기에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성냥 역시 나이브하긴 하지만 그런 정신의 구현임엔 틀림없다. 화약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학적 업적들이 우선 종합되어 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불 즉 모바일 성격의 불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기면서 성냥의 알맹이로 처음엔 유황이 사용되었다. 그것을 인으로 처리한 표면에 그어 불씨를 얻었다. 그러나 인의 가격이 너무 비싼 등 문제가 많아 100 년 이상의 복잡한 화학 재료들과 화학 공정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성냥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 어떤 발명품이건 그 당대까지의 과학적 성취가 집대성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사소해 보이는 성냥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에 해당되는 당대의 산물이 성냥 단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냥뿐 아니라 그 모든 발명품엔 당대까지의 과학적 산물이 적든 많든 집적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스마트폰은 유일한 단독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한 유사 산물이 역사상엔 무수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스마트폰과 성냥은 엄연히 다르다. 정보통신 분야와 화학 내지 일상 소비재 분야로 나눠짐은 물론 엄청 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스마트폰을 무수한 과학적 산물들의 바다에서 유일하게 솟구친 거룩한 성채인양 떠받드는 태도를 지양한다는 뜻이다. 간단한 성냥 한 알에도 그런 정신이 깃들여 있는 바 과학적 성취의 보편성을 우선 인정하며 그 위에 뜬 상당한 매혹의 선물 정도로 여기고 싶은 것이다.
그런 태도를 취할 때 성냥 같은 존재도 우열 중에 열등한 지위에 속하지 않고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스마트폰 류는 그러한 평등성 안에서 또다른 범주인 탁월성의 조명을 받는다. 스마트폰 류의 빛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대단한 작업도 아니지만 이런 눈을 뜨고 마음을 연다면 과학이나 도구들 보편에 대한 폭넓은 애정과 관심이 생기게 된다.
그런 사소한 소품 중에 내가 성냥에 끌린 이유는 그것이 불을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리이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처럼 불이 천상에서 받은 지혜의 상징으로 본다면 스마트폰으로 서핑할 수 있는 온갖 정보의 바다와 통하기도 하고 그 아버지 격에 해당된다고 억지를 부려도 틀린 말은 아니다.
부뚜막의 아궁이나 곤로, 안방을 덮히는 화로 등등에 불을 붙일 때 성냥은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었다. 추운 겨울 온돌 바닥이 펄펄 끓고 따스한 밥과 국을 먹을 수 있는 데엔 성냥이라는 귀한 물건의 봉사가 있었다.
안데르센의 고향인 북구 덴마크의 겨울은 춥기로 유명하다. 성냥팔이라는 직업이 있었다는 자체가 지금 보면 신기한 일이다. 안데르센이 살던 19세기의 덴마크. 가난에 찌들고 주정뱅이 아빠를 둔 작은 여자 아이는 추운 겨울에 성냥을 팔러 시내로 나간다.
가난한 소년이나 소녀가 껌을 팔거나 구두닦이를 하는 것은 어릴 때 봤었다. 에티오피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길거리에서 칫솔에 해당되는 나뭇가지를 팔고 있었다. 저런 것도 파는구나 하는 생경함과 함께 그 나라의 빈곤의 정도가 가슴을 치받고 들어왔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또다른 정황이 안데르센 시절의 덴마크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맨발의 성냥팔이 소녀는 그날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해 팔리지 않는 성냥을 한알 한알 밝혀 몸을 녹인다. 성냥을 켤 때 난로가 보이고, 화려한 만찬이 펼쳐지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인다. 모두 그녀의 결핍의 산물이자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다. 그녀의 할머니마저 나타나 그녀를 결국 죽음의 나라로 데려간다. 그녀는 얼어 죽어가면서 마지막 환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중국의 화약으로부터 이어진 집대성이 없다면 성냥은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내 어린 시절의 동심이자 추억인 성냥팔이 소녀도 성립 불가능하게 된다.
어린이라면 누구나 성냥팔이 소녀에 담긴 서정과 아름다움을 지닐 거라고 생각한 시절이 내겐 길었다. 그 절대성이 상대화가 되어가는 과정이 나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안데르센이 그 소설을 짓던 19 세기 이전엔 저런 정서가 아이들의 무의식에 채워질 수 없었다. 그 시절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아프리카의 허다한 비참한 아이들 역시 저런 동화가 있는지조차 모를 것도 같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저런 동화나 서정의 사각지대가 제법 있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주는 서정이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없어도 아이들은 살아가며 어쩌면 그보다 더 좋은 자연 환경이나 보물을 지니며 살아갈 수도 있다.
사소할 수 있는 성냥이 내게 귀중한 보물처럼 되어 있는 것은 어릴 적에 곤로, 난로, 화로 등등에 불을 붙이던 추억과 프로메테우스의 불, 성냥팔이 소녀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다.
훌쩍 장성한 지금은 스마트폰이 내가 하루에 대하는 물건 중에 가장 애용하는 것일 것이다.
스마트폰 역시 엄청난 선물들을 사람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줄 것이다. 내가 성인이 되어 스마트폰을 만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벌써 몇 년간 애용하고 있음에도 성냥 한 알이 주던 강력한 임팩트까진 없다. 아마 내 삶에선 평생을 다하더라도 스마트폰은 성냥의 아우라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다분히 주관적인 이야기이다. 스마트폰과의 놀이로 유년기를 채울 아이들의 정서는 나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들도 스마트폰에서 불과 서정을 느낄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다른 감각들로 채워질텐데 그것들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 나로선 판단 자체가 어려우며 판단 자체를 늪에 빠뜨리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스마트폰에서 성냥팔이 소녀가 주는 감동과 아우라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칫 주관의 폭력일 수도 있다. 다만 나로선 너무도 단순한 성냥에 입혀진 거의 절대적인 정서를 스마트폰 안의 정보의 바다를 유영하고 앱들을 뒤지고 하루에도 수백통 쏟아져 들어오는 문자들을 읽어도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세대가 갖는 그런 정서가 단지 주관이라는 상대적인 울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왠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주관과 보편이 다소 나이브하며 이분법적인 잣대 위주로 쓰이는 경향이 큰 현대에 그 각각의 뿌리들을 깊게 내리면 더 웅혼한 자리에도 가닿을 것 같다. 주관이되 보편의 광장과도 아스라하게 이어지는 접점들이 많을 것이다. 허술하게 서 있는 주관들을 넘어서 깊은 뿌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보편의 자장을 세대 차이를 극복하며 합심해 이루어가면 멋진 세상이 빚어질 수 있다.
성냥이 잘못 사용되면 화재를 일으키듯 스마트폰도 중독이나 사회성 이반, 개인의 고립화 같은 위험성도 지닌다. 가끔은 스마트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린채 컴컴한 밤에 성냥에 불을 붙여 초를 태워도 좋을 것이다. 촛불 하나만 가지고 빼어난 상상으로 나간 책인 <촛불의 미학>을 쓴 바슐라르에 대한 생각에 잠겨도 좋을 것이다. 바슐라르에 대한 사전 검색을 스마트폰으로 한 상태에서 말이다. 누군가 그런 시간을 간밤에 보낸 다음 아침에 내게 그 소식을 스마트폰으로 보낸다면 나는 밝게 웃는 이모티콘으로 화답할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