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초등 친구들과 모처럼만에 주문진에 놀러갔다가 시장의 어느 건어포 가게에서 친구들이 물건을 고를 때 내 눈을 유독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양미리를 묶어놓은 것이다. 평소라면 지나쳤을텐데 매듭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들어 있던 터라 노란 노끈들의 매듭이 마음을 끈 것이다.
저 매듭이 없다면 양미리들은 줄줄 흘러버려 전시 효과가 사라질 것이다. 항구에 배를 묶어놓을 때, 내 셔츠에 단추를 달 때, 노리개 같은 장식용으로 쓰이는 매듭이 바닷가 건어물 가게에서도 보이자 기분이 상기되었다.
적당한 물건들을 사서 차에 넣어놓고 우리는 바닷가로 나아갔다. 친구 중 한명이 기타를 잘 치는데 여행 때면 매번 기타를 메고 와 우리를 즐겁게 한다. 파도 치는 푸른 바다를 마음껏 바라보다가 우리는 모래 사장에 앉았다. 친구의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러는 중에 이번엔 기타를 향해 내 마음이 요상하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자리를 뜰 때 기타를 연주한 친구를 불렀다.
“저걸 뭐라고 불러?”
기타줄을 가로지르는 쇠를 가리키며 물었다.
“프렛.”
“프렛?”
“기타줄이 달린 긴 나무판을 지판이라고 부르고, 거기에 반음 간격으로 나 있는 쇠를 프렛이라고 불러.”
친구가 말해준 그 프렛이 일종의 매듭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의 기타를 바다를 배경으로 세
워보게 했다.
“쟤 또 발동 걸렸구나”
친구들이 약올리는 소리 속에 뭔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수평선과 나란히 된 저 프렛들을 통과하며 여섯 개의 줄이 지난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줄은 나이론으로 되어 있고 재즈 기타의 경우는 가느다란 강철로 되어 있다. 그 줄을 손가락으로 짚는 것이다.
거기까지 이른 나는 해왔던 내 상상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처음에 나는 기타의 프렛이 매듭으로 상상되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손가락으로 누르는 지점이 매듭인 것처럼 여겨졌다. 실을 엮을 때처럼 실제적인 매듭은 아니지만 기타줄의 어느 한 지점을 순간적으로 나무 판에 붙여서 매듭 효과를 낸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손가락에 의한 그 매듭은 프렛에서 이루어진다. 즉 손가락이 한곳을 짚어줌으로써 실제로는 프렛에 줄이 맞붙기에 그곳에서 매듭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있었던 상상과 결론은 같지만 단순성이 좀더 구체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바이올린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미쳤다.
즉 기타가 손가락이 짚어져 생긴 매듭과 실제로 음악에 필요한 매듭이 다르다고 한다면 바이올린은 그 두 곳이 같다. 즉 손가락으로 짚은 곳이 실제 음악적인 매듭이 되는 것이다.
이 비교가 흥미롭다. 음악 전문가들이나 악기 연주자들에겐 상식일테지만 문외한의 내겐 막 발견된 이 사실이 즐겁다. 첼로나 더블 베이스도 바이올린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어쨌든 기타나 바이올린 류의 현악기들은 현에 매듭 효과가 지어지면서 변주되는 소리가 공명통을 통해 깊어진다.
여기까지 나아간 나는 친구들 틈에 끼여 바닷가를 떠나 걸으면서 아까 본 양미리 묶음이 다시 떠올랐다.
양미리에 실제적인 매듭이 쓰였다면 기타엔 상상적인 매듭이 쓰였다. 그렇게 억지스럽게 짜맞추고 보니 재미가 생겨났지만 차이가 보이고 있었다. 즉 양미리의 매듭이 고정적이라고 한다면 현악기의 매듭은 변동적이다. 즉 매듭을 지었다 풀었다 한다. 매듭의 지점 또한 계속 바뀐다. 매듭을 지었다 풀었다 하며 그 지점을 수시로 바꾸어나가는 것. 그것이 멜로디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멜로디는 통 속으로 들어가 공명을 일으키며 바람 속으로 전파된다.
아름다움이 탄생되는 과정이다. 악기는 미의 공장이다. 미의 생성 공정에 매듭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나갔다가 양미리의 매듭이 과연 고정적인가 싶었다.
고정적이라면 고정적이겠지만 달리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매듭이라고 그 묶인 포인트가 한 점인가? 아니다. 매듭이 지어진 부분엔 실제로 무수한 하위 지점들이 존재한다. 어찌 본다면 무한에 가까운 지점들이 형성된다고 볼 수도 있다.
바람은 그 중 어디를 지나는가. 바람의 마음이다. 그로 인해 바람들과의 무수한 접점들이 생긴다. 즉 바람은 양미리 묶음의 매듭 속의 다채로운 지점들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타의 구조와 같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은 매듭 속의 무수한 접점들에 순간순간 달리 조응하면서 잘 들리지 않는 약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 자체가 하나의 악기 아닌가, 음악 아닌가까지 비약되었다.
현악기는 바람 속에 떨림을 일으킨 다음에 그것을 통 속에 가둔다. 바람 속에서와 공명통 속. 즉 이중의 가공을 통해 음악을 창조한다. 반면에 양미리 묶음은 바람 속에 그 자체로 널려 있다.
그러나 지구나 우주 자체를 공명통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미리 묶음도 거대한 공명통 안에 들어있게 되는 것이다. 광대한 공명통을 부착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 안되지는 않는다.
공명통이 너무도 커서 그 소리들은 차라리 산화해 버린다. 이렇게 본다면 음악을 넘어선 도(道)에 가깝다.
사찰의 처마에 달린 풍경이 그런 모습인데 그것을 닮아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사찰에 소리 이상의 소리를 바람 속에 내는 풍경이 매달려 있듯 주문진의 건어물 가게 앞엔 양미리 풍경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말이 안된다고 누가 시비를 걸면 그 사람이 결국은 자기 논리를 물리칠지도 모르는 말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기타나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등의 악기를 비하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 현악기들은 우리의 삶과 문화를 얼마나 풍성하게 해주는가. 악기 없는 삶은 너무도 고독해져서 우주에 차갑다는 형용사를 붙이는 게 우리 문화에 지배적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무심히 지나갈 수 있었던 허드레 물건 하나가 느닷없이 악기 내지 그 이상으로 비약되는듯한 행복한 현기증이 내 몸의 공명통을 흐뭇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