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실이 격자로 되어 그물이 되려면 매듭이 지어져야 한다. 매듭이 없다면 그물 뿐 아니라 인류의 숱한 문화들이 흐물흐물해질 것이다.
선사 시대에 돌도끼날을 나무에 묶을 때, 천막을 짓기 위해 기둥에 가죽을 묶을 때 이용되던 매듭은 벌목한 나무들을 끌어내릴 때도 이용되었다. 배를 만들어 바닷가에 묶어놓을 때도 필요했다.
신발끈도 매듭이 없으면 안되고 죄수들의 손발을 묶을 때 쓰는 포승줄도 매듭으로 완성된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변질되어 죄없는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시기가 있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노예들을 배에 태워 줄로 줄줄히 믂어 바닷물로 던질 때도 매듭이 쓰였다.
팔찌나 레이스, 장신구에 필수적인 매듭 기술이 그같은 악행에도 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한 동시에 색다른 인식의 지평도 열릴 것이다. 매듭 기술이 없었다면 장신구 류의 치장 문화가 현저히 약해져 인류 문화가 지금처럼 세련되고 화사하게 꾸며지진 않았을 것이다.
매듭으로 발전하기 이전엔 ‘짜기’라는 비교적 단순한 기술이 있었다. 나무 판자를 격자로 짜면 가로로 갈라지기 쉬운 판자의 단점이 보완되어 강도가 세어진다. 현대에 고층 빌딩을 지을 때 필수로 들어가는 철근의 조립 방식도 일종의 ‘짜기’이다. 옛날에 나무로 집을 지을 때 동원된 격자 방식과 이치적으로 동일하다. 물레로 실을 자아 베틀로 천을 짜는 것도 그야말로 ‘짜기’이다.
그런데 짜기의 기술은 곤충이나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거미는 기묘한 방식으로 거미줄을 짜며 협동을 해 베짜기를 하는 개미도 있다. 누에가 몸에서 실을 내어 고치를 짜거나 새가 진흙, 나뭇가지, 풀을 물고 와 둥지를 짜는 일은 본능이나 부모로부터의 학습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실이나 삼베실, 명주실로 천을 짜는 일은 인간만의 탁월함은 아닐 것이다. 벌레나 동물도 하는 것인데 다만 베틀이란 도구를 발명해 색다른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 차이일지도 모른다.
짜기를 하다보면 그 마무리가 필요하다. 마무리가 없으면 끝에서부터 슬슬 풀려 이론적으론 애초 짜지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온다. 그 마무리를 위해 태고적 인간들은 고민과 생각이 깊었을 것이다.
거미줄이나 새의 둥지를 골똘히 들여다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미줄은 접착제가 내재되기에 저절로 붙는다. 둥지는 진흙과 버무려지기에 자연적으로 응고된다. 접착성과 응고성이 없는 끈이나 실은 어떻게든 풀어지지 않게 고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그물은 슬슬 풀어져 애써 잡은 물고기들이 다 빠져 나갈 것이다. 베틀로 짠 천도 슬슬 풀어질 것이다.
짜기와 매듭. 그 사이에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자연계에도 매듭이 있을까? 식물이나 벌레, 동물도 매듭을 지을까. 그들의 몸 안엔 있을 것이다. 뼈와 뼈 사이를 잇는 인대가 일종의 매듭으로 불림직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실행을 할 수 있을까? 지구의 숱한 생명체들에 그런 기이함을 지난 것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내 지식으로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되거나 누군가 이미 알고 있다면 지금 말하려는 가설은 깨질 것이다. 그래도 무방하다. 나의 글쓰기는 유연성이 있으므로 그 새로운 사실을 기반으로 새롭게 쓰면 된다.
무지와 한계를 상정하고 감히 말한다면 짜기는 자연적인 것이며 매듭은 인공적인 것이다. 즉 인간만이 짜기를 너머 매듭까지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식물이나 벌레, 동물에겐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도 넘치니까. 단지 자연과 문명을 굳이 구분할 때 그 분깃점 중의 하나가 매듭일 가능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매듭과 더불어 문명의 레일이 스무드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매듭의 기술이 이루어진 이후 그물이나 선박의 고정, 포승줄, 집, 옷 등등의 실용적인 면에서 무한에 가까운 발명품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까 말했듯 팔찌나 레이스, 장신구, 자수 등등 장식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발전이 이룩되어 문화를 멋지게 데코레이션 했을 것이다.
일상 용어 중에 ‘매듭을 짓다’라는 말이 있다. ‘결자해지’라는 말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결자해지의 결자가 매듭 결(結)이다. 즉 결자해지라는 말은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결말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에선 ‘매듭을 짓다’와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매듭을 짓다’는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엉성한 상태에서 확실하게 결말을 내자는 뜻이다. 반면에 결자해지는 말했다시피 매듭을 짓듯 맺은 사람이 풀어서 결말을 짓는다는 뜻이다.
이런 말들은 당연히 인류사에 매듭이 등장하기 이전엔 없는 말이었다. 매듭이 등장하게 되고 그에 따른 이름이 만들어짐에 따라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매듭을 짓다’나 ‘결자해지’라는 말 내지 그 의미는 그물을 짓거나 선박을 고정할 때의 매듭과는 다르다. 물질적인 차원에서 정신적인 차원으로, 보이는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확장 내지 상승된 것이다.
사랑도 보이지 않는 매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결실인지 구속의 시작인지 생각하기 나름인 결혼 역시 하나의 매듭이다. 결혼(結婚)의 ‘결’자가 매듭 ‘결’이다.
선사 시대에 그물을 만들 때나 바느질을 마무리할 때 쓰였던 매듭의 기술이 인간사의 중대한 결혼으로도 이어지며 적용된 것이다. 까마득한 시절의 매듭과 현대인의 결혼 사이에 모종의 연결망이 있는 것이다.
해혼이라는 말도 곧잘 들리는 시대이다. 결자해지의 그 해(解) 곧 풀 해자이다. 맺은 혼인을 이제 그만 풀고 각자 자유롭게 살자는 뜻이다. 현재의 결혼 제도가 정착 문화에서 생겨났을텐데 유전자에 정주민 뿐 아니라 유목민적인 면 또한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선 본능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해혼에 나는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 다만 인류사의 기나긴 여정을 깔고 보면 결혼이든 해혼이든 절대 아닌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인다는 말 정도만 하고 싶다. 상대적이니까 뭐든 내키는대로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가정이라는 끈끈한 울타리 안의 식구들의 삶이 함께 걸린 문제이기에 신중할수록 좋을 것이다.
인도엔 해혼의 풍습이 있다고 한다. 매듭의 기술이 인류사에 다채롭게 펼쳐나갔듯 문명에 따라 결혼 및 그 이후의 방식도 다양할 것이다.
졸혼이라는 유행도 일본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인데 이혼과도 다르고 해혼과도 다르다고 한다. 결혼이라는 틀은 깨지 않은채 각자 자유롭게 살자는 취지라고 한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계약 결혼을 해서 파란을 일으켰는데 그완 또달리 특이하다. 일본적이라는 느낌과 함께 지나친 스트레스 속에 욕망의 형태가 다채로운 현대 사회에 일어날 수도 있는 현상 같다.
결초보은도 매듭과 관련된 말이다. 풀을 엮어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중국의 춘추 시대에 생긴 말이다. 아득한 선사 시대의 매듭이 이천 여 전인 중국에서 또다른 의미로 맺어진 사실이 흥미롭다.
물질적인 매듭 기술이든 결혼이나 이러한 사례 같은 것이든 매듭에 대한 담론 역시 넘치도록 풍부할 것이다. 매듭하면 마디가 연상되는데 매듭과 마디는 딱부러지게 대립적인 개념이 아닌듯하다. 매듭과 매듭 사이에 마디가 있다고 할 수도 있고 매듭 자체가 마디의 성격을 띠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마디와 마디로 연결되지만 그 사이를 매듭이라고 말하긴 뭣하다. 매듭은 말했다시피 어쩌면 인간만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매듭. 그 단순함 속엔 실로 놀라운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을 것이다. 결초보은이라는 의미와 실행이 약해진 이 시대에 아름다운 매듭들을 잘 지어나가면 사회가 좀더 훈훈하고 밝아질 것이다.
이명훈 (소설 ′작약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