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弱 루피', 美 고율 관세 충격 완화하며 11월 수출 호조 견인
美와 무역 협상 체결 못하면 루피 추가 절하 전망
[방콕=뉴스핌] 홍우리 특파원 = 인도 루피의 급속한 약세가 일부 완화했다.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지던 달러당 90루피를 돌파한 데 이어 91루피까지 넘어서자 인도 중앙은행(RBI)이 긴급 개입하면서다.
다만 시장에서는 RBI의 환율 방어 의지가 다소 약한 것으로 평가한다. 사상 최저치에 머물고 있는 루피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RBI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약(弱) 루피'로 미국의 고율 관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의도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달러당 91루피 돌파 뒤 시장 진정 나선 RBI
달러 대비 루피 가치는 올해 약 6% 절하된 상태다. 11월에만 0.8% 하락하더니 이달 들어 16일까지 1.8% 추가 하락했다.
17일 개장 초반 달러당 91.08루피 부근까지 하락했던 루피 가치는 달러당 90.39루피로 거래를 마쳤다. 16일 종가(달러당 91.0275루피) 대비 0.7% 상승하면서 7개월래 최대 일일 상승 폭을 기록했다.
루피의 급격한 반등을 이끈 것은 RBI였다. 로이터 통신은 은행 관계자들을 인용, RBI가 17일 개장 직후 현물 시장과 선물(NDF) 시장 모두에서 대량의 달러를 매도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RBI가 16일 외환 스왑을 통해 50억 달러(약 7조 3950억 원) 상당의 달러를 매입한 뒤 또 다시 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릴라이언스 증권의 수석 연구 분석가인 지가르 트리베디는 "최근 몇 달간 보여줬던 강력한 개입과 마찬가지로 RBI의 신속한 조치는 루피화의 일방적인 하락세를 꺾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 루피 약세에도 기준금리 인하...환율 방어보단 '성장'에 방점
루피의 최근 약세는 인도 국내 경제 펀더멘털보다는 외부 요인에 기인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무역 적자 확대와 미국의 50% 관세, 지속적인 외국인 자금 유출 등의 영향으로 루피는 올해 전 세계 주요 통화 중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코탁 뮤추얼 펀드의 채권 및 상품 부문 최고투자책임자인 디팍 아그라왈은 "달러 대비 루피 가치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한 것은 주로 외부 요인 요인에 의한 것이지 국내 경제 약세 때문은 아니다"며 인도의 견조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충분한 외환보유고·관리 가능한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지속적인 외국인 투자자 매도가 투자 심리에 부담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RBI의 향후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앞서 10월과 11월, 달러당 89루피 수준에서 환율 방어에 나섰던 것과 비교해 RBI가 시장 개입을 자제하는 분위기라며, RBI가 루피 약세를 일부 용인하고 있다는 관측이 더욱 힘을 얻는 모양새다.
RBI는 이달 초 열린 통화정책위원회(RBI) 회의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고, 이에 더해 향후의 기준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을 열어놨다. 자금 유출로 인한 루피 절하 압박이 상당하지만, 이보다는 물가와 경제 성장 지원에 정책 방점을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통화 가치 하락은 수출품의 달러 가격을 낮춰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경제 성장을 강조하고 있는 RBI가 금리 인하로 내수를 뒷받침함과 동시에 미국의 고율 관세 충격 완화 수단으로 환율을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RBI가 17일 대규모 달러 매도에 나서기 전, 일각에서는 RBI의 환율 방어력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을 제기했다. RBI의 640억 달러 규모 숏 달러 포지션으로 인해 현물 시장에서 루피 지지를 위한 추가 달러를 자유롭게 투입하기 어렵고,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서 외환보유고 활용 여지도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신한은행 트레저리 책임자 쿠날 소다니는 "대규모 달러 숏 포지션으로 인해 RBI의 공격적 달러 매도 의지가 약화돼 루피가 자금 흐름에 따른 압박에 더 취약해졌다"고 블룸버그에 전했고, IDFC 퍼스트뱅크 애널리스트들도 대규모 달러 숏 포지션이 RBI의 개입 능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인도의 외환보유액은 7000억 달러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弱루피'로 거둔 수출 쾌거...트럼프 고율 관세 버틸 '맷집' 얻어
루피 약세가 외국인 자금 이탈을 부추기며 올해 들어 현재까지 약 180억 달러 이상이 인도 증시를 빠져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루피 약세가 수출 호조를 견인한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인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고율 관세를 버티는 효과적 수단이자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지렛대가 되고 있다.
인도 상공부의 15일 발표에 따르면, 인도의 11월 대미 상품 수출액이 69억 8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2.61% 늘어난 것으로, 인도 전체 수출 증가율(19% 이상)을 앞지르는 것이다.
인도의 대미 수출은 지난 9월과 10월 두 달 연속 각각 전년 동기 대비 11.9%, 8.58% 감소했었다. 25%의 국가별 상호 관세에 더해 러시아산 원유 수입에 따른 25%의 제재성 추가 관세까지 총 50%의 관세가 한 달 내내 적용되기 시작한 첫 달인 9월 대비 10월에 대미 수출 감소 폭을 줄인 데 이어 11월에는 큰 폭 반등한 것이다.
분석가들은 인도 경제가 7~9월 분기 8.2%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것과 맞물려 11월 대미 수출이 급반등하면서 인도가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여유를 갖게 됐다고 평가한다.
글로벌 무역 연구 이니셔티브(GTRI) 설립자 아제이 스리바스타바는 "관세 인하 없이도 대미 수출이 회복세를 보인 가운데,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대폭 줄인 인도는 이제 관세를 50%에서 25%로 인하하도록 압박할 수 있는 협상력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수출 지표에 고무된 인도 정부 관계자들은 무역 협상에서 미국의 농산물 수입 요구에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며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핵심 요구 사항인 유전자 변형 농작물이나 옥수수의 수입 확대 요구를 수용할 계획이 없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대중 수출 증가도 눈길을 끈다. 인도의 지난달 대중 수출은 전년 대비 90% 급증한 22억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이 1조 달러 이상의 무역 흑자를 기록한 시점에 나타난 대중 수출 증가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전쟁으로 인해 세계 무역 흐름이 재편되고 있음을 시사하며, 인도 역시 대미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는 안도감을 제공한다.
모간스탠리 투자운용의 솔루션 및 멀티에셋 그룹 부책임자인 지타니아 칸다리는 루피화 가치 하락을 트럼프 집권 1기 당시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인한 위안화 가치 하락에 비유하며, 미국의 고율 관세가 유지될 경우 루피의 지속적인 약세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안화는 일련의 보복 관세 발표로 인해 2018년 3월부터 2020년 5월 사이에 약 12% 하락한 바 있다.

◆ 루피 약세 반전 모멘텀은 美·印 무역 협상 타결
루피 약세를 반전시킬 재료는 미국과의 무역 협정 체결이다. 뭄바이 소재 한 은행 관계자는 "(17일 RBI) 개입 이후 심리적인 효과가 작용하고 있지만 시장은 여전히 루피의 유의미한 상승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고 로이터에 전했다.
전문가들은 무역 합의 타결로 관세 불확실성이 해소된다면 외국인 자금 흐름이 바뀌면서 루피 절하 압력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루피화 가치가 3~6% 상승해 달러 대비 80루피 후반까지 회복될 것으로 전망한다.
아그라왈은 "RBI는 특정 환율 수준을 방어하기보다는 변동성을 억제하는 데 집중하면서 시장 주도적 접근 방식을 지원하고 있다"며 "무역 협상이 타결되고 자본 유입이 개선된다면 내년에는 루피 가치가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협정 체결에 실패할 경우 루피 가치 약세가 이어질 수 있다. 일부 분석가들은 높은 관세에 따른 수출 부담, 외국인 경계심 강화, 달러 수요 강세로 인해 루피 가치가 내년에 달러당 90~95루피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hongwoori84@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