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김성주는 '조선혁명군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吉江指揮部'가 생긴 직후 이 조직의 일을 하지 않았다. 오가자에 있던 길흑농민동맹 일을 보았다. 그는(김성주)는 길흑농민동맹이 사실상 빼앗은 전(前) 요하농촌공소 책임자였던 이만진의 집에서 이만진의 아들 동갑내기 이선일(李善一)과 같은 방에서 지냈다. 이때 김성주는 최형우(崔衡宇)라는 인물로부터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호를 받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김성주는 한인 공산주의운동 역사에 이름에 한일(一), 별성(星)을 쓰는 세 사람의 김일성(金一星) 중 한 명이 되었다.
한 명은 김좌진 장군을 살해케 하고 맞아 죽은 본명이 김봉환(金奉煥)의 별호 김일성(金一星)이다. 또 한 명은 1930년 5월 30일 간도 폭동 때 만주 용정에 있던 대성중학교 학생으로서 행동대장 임무를 수행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소련으로 건너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예하 제2방면군장이 되는 김일성(金一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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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AI 생성 이미지] |
최형우는 광복 후, 1946년 9월 서울 종로 천도교 강당에서 창당한 신진당(新進黨) 중앙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최형우는 190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김성주에게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호를 지어준 사연은 이렇다. 최형우는 요하농촌공사 책임자였던 이만진이 세운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사였다. 당시 삼성학교 교장은 아동문학가 이몽린(李夢麟)이었다. 훗날 조선혁명군 사령관이 되는 고이허(高而虛), 안육주(安六洲) 등이 선생으로 있었다.
어느 날 최형우가 삼성학교를 설립자 이만진네 집을 방문하여 이만진 아들과 같은 방에 거주하는 김성주를 만났다. 최형우는 김성주에게 "만주에서는 중국 사람처럼 별호가 있어야 한다. 별호 하나 짓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이에 김성주는 "좋은 별호 지어 달라"고 했다. 최형우는 별호 몇 개를 지어 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하라"라고 했다. 김성주는 여러 개의 별호 중에서 "김일성(金一星)이 마음에 든다. 나도 장군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최형우는 "그래 그러면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라며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호를 써 주었다. 김성주가 선택한 별호 김일성(金一星)은 외할아버지 강돈욱, 아버지 김형직이 말한 김일성 장군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김성주는 이후 별호 김일성(金一星) 쓰면서 길흑농민동맹 일을 보았다. 김성주가 수행한 주요 일은 지역 내 거주하는 한인을 대상으로 수확의 10%를 현금으로 징수하는 것이었다. 현금으로 안 내면 반동으로 몰아 살인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1930년 가을에 발생한 '길흑농민동맹사건' 이다.
김성주는 1930년 가을 만주 땅 대유수(大楡樹)에 살고 있던 한인 동포 지주 정모(鄭某)를 반동으로 몰아 변달환(邊達煥), 한영서(韓永瑞), 천학진(千學振) 등 길흑농민동맹 오가자 지부 군사 세포 대원들과 함께 목 졸라 죽였다. 또한 그는(김성주) 또 오가자에 사는 중국인 지주 2명을 혼자서 직접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살인도 저질렀다. 당시 오가자 일대 한인사회에서는 이 사건을 '길흑농민동맹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성주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김성주는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오가자 일대에서 한자 이름은 모른 채 발음상으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 만주 지역 군벌 장학량(張學良)은 '길흑농민동맹사건'을 계기로 1930년 5·30 간도 폭동을 일으킨 공산주의 세력 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종락은 1930년 12월 '조선혁명군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吉江指揮部'를 '재만조선혁명군사령부在滿朝鮮革命軍司令部'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으로 위장하여 장학량 부대 토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종락이 1931년 1월 12일 장학량 부대에 체포됨으로써 이종락 부대는 해체되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