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다카이치 사나에 집권 자민당 총재가 일본의 새 총리로 선출되면서, 한일 관계의 향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강경 보수파'로 평가되는 다카이치 총리는 역사 인식과 안보 정책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노선을 계승해 온 인물이다.
특히 총리 선거를 앞두고 중도 보수 성향의 공명당이 연립정권에서 이탈하면서, 우익 성향이 강한 일본유신회와 새롭게 연정을 구성한 점이 한일 관계의 변수로 주목되고 있다.
◆ 과거사 문제, 강경 발언 이어가나
다카이치 신임 총리는 자민당 내 대표적 보수 정치인으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불려왔다.
전후 일본의 안보 체제와 역사 인식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 왔으며,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의 입장과 배치되는 강경 발언을 거듭해 왔다. 한일 관계의 뇌관으로 여겨지는 야스쿠니 신사를 꾸준히 참배했고, 헌법 9조 개정에도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그는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일본이 사죄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며, 과거사 문제에서 유연한 접근을 해 온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나 스가 요시히데 전 내각과는 다른 노선을 분명히 했다.
다만 지난해 총재 선거 때는 "총리로 취임할 경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번에는 "적절히 판단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나타냈다.
실제로 이달 17~19일 진행된 야스쿠니 신사 추계 제사 기간에는 직접 참배하지 않고, 첫날인 17일에 '다마구시'라고 불리는 공물 대금을 사비로 봉납하며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일본 언론들은 "다카이치 총재가 총리로 선출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한국, 중국의 반발 등 외교적 영향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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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제104대 일본 총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의원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연정 변화, 한일 관계의 새로운 변수
자민당의 연립정권 파트너 교체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변수다.
자민당은 오랜 동맹이던 공명당과의 연정을 끝내고, 대신 우익 성향의 일본유신회와 손을 잡았다. '공명당에서 유신으로'의 전환은 일본 정치의 중심축이 중도 보수에서 보수·우익으로 이동했음을 상징한다.
자민당과 유신회가 맺은 연립 합의문은 이러한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서두에서 '국가관의 공유'와 '자립하는 국가'를 내세우며, 인권·법치 등 공명당이 중시해온 표현은 사라졌다.
헌법 9조 개정, 스파이 방지법 제정, 대외정보청(가칭) 신설 등 공명당 시절에는 추진이 어려웠던 정책이 다수 포함됐다. 국가 상징인 히노마루(일장기) 훼손을 처벌하는 '국장손괴죄' 신설, 방위비 증액과 원자력 잠수함 도입 검토, 방산 장비 수출 제한 폐지 등도 명기됐다.
안보 정책 방향도 '평화국가'에서 '강한 국가'로 확연히 선회했다. 양당은 헌법 9조 개정을 위한 협의회를 설치하고, 긴급사태조항 신설 등 국가 권한을 강화하는 방안을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2024년 자민·공명당 합의문에 포함됐던 '군축'이나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표현은 이번 합의에서 완전히 빠졌다.
이러한 연정 변화는 일본의 외교·안보 정책이 한층 보수적이고 자주적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예고한다. 특히 '국가 중심의 안보'와 '과거사에 대한 단호한 입장'이 결합할 경우, 한일 관계에도 새로운 긴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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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오른쪽)와 요시무라 히로후미 일본유신회 대표가 20일 연립정권 합의에 서명한 후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안보와 경제 현실은 '협력' 요인
그러나 양국 관계가 갈등만으로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점차 고도화되고 있고,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안보 협력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반도체, 배터리, 핵심 소재 공급망 안정화는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전략적 과제다. 다카이치 총리가 경제안보담당상 시절 강조한 "산업과 안보의 일체화"라는 구상은 이 같은 분야에서 협력의 필요성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 역사 문제로 갈등이 불가피하더라도 안보·경제에서 실리적 협력이 병행되는 '이중 궤도'가 현실적이라는 관측이다.
일본 내에서는 "다카이치가 보수적 색채가 짙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민당이 의회 과반을 상실한 상황에서 총리가 지나치게 강경한 노선을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다"며, "실제 국정은 정치적 제약 속에서 안보·경제 실리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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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신임 총리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역사문제 정치화하면 한일 대립 고착화
향후 한일 관계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관리된 갈등'이다. 역사 문제에서 충돌은 이어지지만 안보·경제 협력이 병행되는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두 번째는 '단발적 충돌'이다. 야스쿠니 참배나 과거사와 관련해 강경한 발언이 나올 때마다 외교 마찰이 반복돼 관계가 개선과 악화를 오가는 불안정한 국면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구조적 악화' 시나리오다. 다카이치 총리가 역사 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한국과의 대립이 고착화되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한미일 안보 협력에도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
다카이치의 일본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 취임은 일본 정치사에서 상징적 전환점이 될 사건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클릭이 가속화될 경우 한일 관계에는 악재로 작용할 우려도 크다.
다카이치 총리가 일본의 새 총리로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양국은 단기적 갈등과 실리적 협력 사이에서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goldendo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