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한민국 사회와 국가 인프라는 '해킹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면치 못하고 있다. 통신·금융·공공기관을 가리지 않고 연쇄적으로 터지는 해킹 사고는 단순한 정보 유출을 넘어 사회 전반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피해는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의 경쟁력,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 더 나아가 국가 안보의 근간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대응은 여전히 땜질식에 머물고 있고,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 뉴스핌은 <해킹공화국> 기획을 통해 해킹 실태와 구조적 원인을 짚어보고, 제도적·정책적 대안을 모색한다.
[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 인터넷 뱅킹과 온라인 쇼핑, 통신 서비스 등 디지털 서비스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상황에서 해킹과 사이버 침해 범죄는 날로 진화하고 있다.
올해 4월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비롯해 예스24, 롯데카드 등 국내 기업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잇따른 가운데 이들의 늑장 신고와 지연 대응은 사회적 불신을 키워 놓았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소위 선진국에서도 해킹 사고는 빈번하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대응의 긴밀함과 투명함에 있다. 이들 보안 선진국은 대규모 해킹 사고 발생 시 '투명한 공개 → 신속한 피해 복구 → 책임 있는 배상과 처벌 → 제도 보완'이라는 대응 사이클을 체계화해 피해 범위와 재발 위험을 줄이는 데 전념하고 있다.
[해킹공화국] 글싣는 순서
1. "보안 없는 AI 강국은 사상누각"…기업을 넘어 국가 안보 위기
2. KT·SKT·롯데카드…4월 이후 매달 해킹 사고
3. 창과 방패의 끝없는 전쟁…北·中 등 해킹에 韓 사이버 안보 '구멍'
4. 사모펀드 MBK식 경영 '도마 위'에…제2롯데카드 사태 우려
5. 보안 선진국들은 해킹에 어떻게 대처하나
6. 정보보호 투자 확대·개별통지 의무화…예방책 입법 과제
7. 휴대폰부터 SNS까지 털렸다…연예계도 "대책 필요" 아우성
◆ 집단 배상과 강력 처벌 하는 미국
2021년 미국 3대 이동통신사 가운데 하나인 T모바일에서는 해킹 범죄로 약 7660만 명 고객의 이름, 생년월일, 사회보장번호, 운전면허증 등 민감 정보가 유출됐다.
T모바일의 대응은 빨랐다. 유출 사실을 즉각 공개했다. 전 고객에게 이메일과 문자로 알림을 발송했고 피해 여부와 관계없이 2년간 무상 맥아피(McAfee) 보안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후 집단소송 합의에 따라 총 3억5000만 달러 배상에 합의하는 한편 자체 보안 시스템 강화에 2023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추가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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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 로고 [사진=로이터 뉴스핌] |
이통사 AT&T 역시 연이은 해킹으로 홍역을 치렀다. 2023년에는 외주 마케팅 업체의 클라우드 저장소에서 고객 890만 명의 이름, 무선 번호, 회선 수 등 고객 독점 네트워크 정보(CPNI)가 유출돼 연방통신위원회(FCC)로부터 1300만 달러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듬해에는 약 1억여 명의 통화 및 문자 기록이 해킹당해, 회사는 해커와 협상을 벌여 37만 달러를 지급하고 데이터 삭제를 요구하는 조치를 취했다. 2024년 3월에도 현재 사용자 760만 명과 과거 고객 6540만 명의 개인 데이터가 다크웹에 유출됐다. 이 사건으로 현재 FCC 조사와 함께 미국 각 주에서 20여 건에 달하는 개별·집단 소송에 걸려있다.
미국의 기업규제는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그러나 위법 행위와 고객 피해가 발생했을 때 처벌은 엄하다. 재발방지를 위한 내부와 외부의 점검은 가혹해진다.
해킹 사고도 마찬가지다. 사고 인지시 즉각적 공개, 피해자 대상 실질적 보상, 기업에 대한 징벌적 과징금을 기본으로 한다. 더 나아가 연방·주 차원에서 해킹 발생 72시간 내 신고 의무, 독립적 외부 감사, 피해자 보호제도까지 촘촘히 작동한다.
◆ 정부가 나서 적극 대응 법제화 한 일본
올해 2월 일본에서는 대형 보험대리점 '호켄미나오시혼포'가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고객정보 약 510만 건이 유출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회사는 즉시 서버를 격리하고 외부 전문가와 합동 조사를 벌였다. 피해자 통지와 관계기관 신고 등 표준 대응 절차를 따랐다.
앞서 2024년 6월에는 일본 대표 출판사 카도카와가 피싱·랜섬웨어 공격으로 개인정보 25만 건을 유출당했고, 2023년에는 라인야후에서 이용자·거래처 개인정보 51만 건이 새어나가는 등 대형 침해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20년에는 중국 해커가 일본 정부의 군사 기밀망을 침투해 작전계획과 안보 관련 정보가 대규모로 유출되면서, 일본의 기밀 보안 체계와 미·일 동맹 내 정보 공유 신뢰까지 흔들린 바 있다.
이처럼 대형 해킹이 반복되자 일본은 '수동적 방어'에서 '공격적 방어'로 정책 기조를 전환했다. 2022년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을 통해 유출 시 공공·민간을 막론하고 정부 신고와 피해자 통지를 의무화했고, 과징금과 형사처벌 수위도 대폭 강화했다. 또 단기 정보보관 업종까지 규제 범위를 확대했다.
이어 2025년 의회를 통과해 2027년 시행 예정인 '적극적 사이버 방어법'은 국가기관이 사이버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해커 서버를 선제 차단·무력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지방정부·민간·지자체 단위의 모의훈련을 정례화하고, 중앙정부가 대응 템플릿을 제공하는 등 민관 협력 체계도 실전체계로 정착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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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벨기에 브뤼셀 본부 앞에 서있는 EU기 기둥. 2022.09.28 [사진=로이터 뉴스핌] |
◆ 공동 방어체계 실전 가동하는 유럽
유럽에서는 런던 히스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브뤼셀 등 유럽 주요 공항과 항공사 정산·티케팅 시스템이 동시다발적으로 랜섬웨어 공격에 노출된 사고가 있었다. 유럽 전역 400여 개 공항에서 수백, 수천 편의 항공기가 연쇄적으로 지연·취소되는 대혼란이 빚어졌다.
사고의 스케일에 비해 정상화는 비교적 빨랐다. 유럽연합(EU) 사이버보안청과 각국 정부가 즉각 합동 비상대응에 나서 실시간 정보 공유와 복구 지휘를 진행한 덕분이다.
유럽은 제도적 대응에서도 세계적 수준이다.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은 개인정보 유출 시 기업 연간 글로벌 매출의 최대 4%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어, 기업들에 강력한 보안 투자 압박으로 작용한다.
또한 2025년 2월 발효된 사이버연대법(Cyber Solidarity Act, CSA)은 회원국 간 위협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고 EU 공동 보안운영센터(SOC)를 가동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핵심 인프라에 대한 정기 모의훈련과 비상 대응 메커니즘을 의무화했으며, 위기 발생 시 회원국 간 인력을 신속히 파견하는 'EU 사이버 예비군(EU-Cyber Reserve)' 제도도 신설했다.
여기에 더해 NIS2 지침(네트워크 및 정보 보안 지침 2)은 사이버 사고 발생 시 72시간 내 신고를 의무화하고 위반 기업에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주요 인프라와 기업에는 피해자 구제 절차와 대국민 통지 의무도 함께 부된다.
◆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해킹 사고의 공통점은 늑장 대응과 사건 은폐다. 피해를 인지하고도 공개를 미루거나 축소하다가 뒤늦게 신고하는 탓에, 2차 피해 우려가 커지고 국민 불신은 깊어졌다. 반복되는 "사후 뒷북 대응"을 끊고 글로벌 수준의 투명·선제 대응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즉각 통지·공시 의무화다. 해킹이나 개인정보 유출 사실을 인지하는 즉시 정부와 당사자에게 알리고, 72시간 내 공개하도록 법으로 못 박아야 한다. 이는 유럽연합의 GDPR과 NIS2 지침처럼 정보 공개를 최우선 원칙으로 삼는 모델이다.
피해자 배상제도 강화도 뒤따라야 한다. 미국·EU처럼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 기업이 피해를 은폐하거나 늑장 대응할수록 더 큰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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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와 개인정보유출 일러스트 이미지. [사진=챗GPT 생성] |
보안관리 책임 체계 역시 강화가 필요하다. 대형 기업에는 최고정보보안책임자(CISO) 지정을 의무화하고, 해킹 사실을 은폐하거나 신고를 지연할 경우 경영진에게 직접 형사 책임과 과징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사고 수습에 급급하기보다 평소 보안 투자와 내부 관리 체계를 강화하도록 유도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민관 합동 대응체계도 상시 가동돼야 한다. EU의 '사이버 예비군'처럼 정부, 기업, 보안전문가가 즉시 협력할 수 있는 합동 대응센터를 두고, 피해 기업에는 긴급 인력과 자원을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기업의 보안 투자와 훈련,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정기적으로 보안 투자 현황을 공시하고, 주요 인프라 기업은 모의훈련과 보안 인증제를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아울러 국제 공조 채널 확대도 중요하다. 중국·북한발 해킹 피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위협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국제 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하고, 주요국과 합동 모의훈련·복구 체계를 운영하는 '한국형 글로벌 연합 대응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투명 공개, 신속 통지, 피해자 배상, 민관 합동 대응, 국제 공조를 핵심 축으로 삼아야만 한국은 '해킹에 취약한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사이버 재난에 실질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wonjc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