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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 (상) 장경태, 등록금 고민이 정치 입문 계기

기사입력 : 2024년10월11일 09:00

최종수정 : 2024년10월11일 09:00

흙수저 정치인 성공비결 "초긍정과 주제 파악으로 막판 대역전극"
"직업 정치인 길 너무 좁다, 정치연수원 만들어 공부 기회 줘야"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위원장인 장경태 의원은 정치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는 뉴스핌 '폴리티션 스토리'에 출연해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정치에 대한 꿈을 키운 배경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장 의원은 10일 오후 '뉴스핌 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냈던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했다.

장 의원은 1983년 전라남도 순천군에서 태어났다. 순천고를 다닐 때 가정 환경이 어려워져 대학을 가지 못할 정도였는데, 장 의원은 남들보다 늦은 시간인 2004년 서울시립대를 들어가면서 정치에 대한 꿈을 키웠다. 장학금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정치 입문의 계기가 됐다.

장 의원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을 어머니라고 꼽았다. 사춘기 당시 방황을 할 때도 어머니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항상 기억해라"고 말했다. 그는 "제가 방황하거나 엇나가는 일탈을 하더라도 제가 뭘 하고 있는지 항상 고민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 투신의 계기에 대해서는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국가든 누군가가 등록금만 보전해주면 취업 이후 갚으면 되는데 저는 너무 막막했다"라며 "정말 기댈 곳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냉정한 현실에 맞닥뜨리면서 그런(정치)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2024.10.10 dedanhi@newspim.com

다음은 장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기자, 이하 채) 정치인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는 폴리티션 스토리 시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행을 맡은 정치부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주실 최연혁 스웨덴 린넨대 교수님 모셨습니다.

-(최연혁 교수, 이하 최) 네, 안녕하십니까?

-(채) 오늘은 더불어민주당 재선 국회의원이자 서울시당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장경태 의원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장경태 의원, 이하 장)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채)의원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좀 근황을 말씀해 주세요.

▲(장)재선 이후에 근황만 말씀드리면 선거 끝나자마자 저는 과거에 했던 혁신위원장 때의 여러 의제들을 좀 모아서 당원 당규 TF 단장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당헌당규 개정에 앞장을 섰고요. 또 그 이후에 여러 가지 검찰 독재 정치탄압대책위원장을 맡아서 검찰 개혁과 관련된 입법이라든지 여러 대응 활동 등을 많이 했고요. 그 이후에 이제 전당대회 앞두고 정말 서울시 특별시당위원장이라는 나름의 큰 결의와 각오를 하고 도전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다행히 나와서 또 우리 서울에 있는 많은 선배 동료 의원님들이 힘을 또 모아주셔서 당원과 함께 당원주권 시대를 열어갈 서울특별시당위원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그러고 보니까 법사위에 배정돼서 재선 이후 법사위원으로서 정말 여러 상임위에서 통과된 각종 법안에 대한 체계적으로 심사나 또 법사위의 여러 기관인 대법원, 헌법재판소, 공수처, 법무부, 대검찰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피감기관에 대한 국정감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열심히 배우는 국회의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채)본격적으로 의원님의 삶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제 주변에 의원님이 저희 폴리티션 스토리에 나와주신다고 말씀을 했더니 가장 먼저 나오는 얘기가 이제 흙수저 출신의 의원님께서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하다더라고요. 의원님께서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셔서 그쪽에서 춘천고를 나올 때까지 계셨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좀 어떤 학생이셨는지 좀 궁금합니다.

▲(장)저는 태어나서 초·중·고등학교를 다 순천에서 나왔고요. 거기서 이제 살 동안 방황도 많이 하고 좀 그랬던 것 같아요. 80년대생들이 아마 대부분 다 기억할 텐데 저희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사춘기 시절에 IMF로 여러 걱정과 고민 또 방황을 했던 시기가 있었고요. 또 그 시기를 거치면서 저도 여러 방황을 했었는데 다들 놀라시겠지만 고등학교 때 제가 합창단 활동과 더불어 댄스부 활동을 했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좀 나름의 이 어려웠던 고민이 있었던 이 사춘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고요. 또 그 이후에 이제 대학을 진학하게 되면서 또 대학생이라기보다는 알바생으로 많이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교는 3시간씩 하루에 3시간씩 15학점 정도 듣는데 아르바이트는 제가 8시간 정도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지 아르바이트 하다가 취미 삼아 학교를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학교 수업 시간보다는 아르바이트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버티고 이겨내서 오게 됐고요. 처음에 이제 당에서 활동할 때 이제 20대 초반에 이렇게 당에서 20대 초반부터 활동하다 보니까 많은 선배 당원들께서 "경태야 너는 몇 살이냐"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저 83인데요. 그랬더니 83이 학번이 아니고 연생이 있다고 그러면서 아주 놀랐던 기억이 나는데 벌써 이 그때 선배님들이 놀라셨던 83이 40대가 됐습니다. 이제 어린 애 아닙니다.

-(채)의원님 순천고 다니실 때 고3 때쯤 이제 가세가 조금 어려워지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상황이었나요.

▲(장)저희가 이제 두 번이 있는데요. 부모님께서 이제 명예퇴직하시고 나서 중3 때인가 아버지께서 그때 좀 이제 진짜 방황을 많이 거쳤던 것 같은데 항상 이제 아버지라고 하면 좀 항상 약간 능력자 슈퍼맨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잖아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 근데 아버지가 실직하시고 나서 한 2년 가까이 집에서 놀고먹고 노셨는데 그때 그 정말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서 좀 화도 나고 또 마음속으로 좀 안타깝기도 하고 그런 반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나 홀로 좀 개척해 나가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두 번째 이제 고등학교 또 대학교 1학년 왔을 때 위기가 와서 그때 아버지께서 여러 소송에 휘말리셔서 그때는 이제 '내 힘으로 돈을 모아서 대학 학비를 벌고 돈을 모아서 다녀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때부터 이제 아르바이트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채)의원님께서 어린 시절에 가장 좀 영향을 미쳤던 분이 누군지 좀 궁금합니다. 어떤 분이셨고 어떤 에피소드가 좀 있으신가요?

▲(장)제 삶에서 어머니가 제일 영향을 많이 주셨던 것 같아요. 근데 어머니가 항상 제가 방황을 하고 약간 뭐 공부도 안 하고 막 사고뭉치로 살 때 항상 저한테 그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너가 뭘 하고 있는지 항상 기억해라라는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약간 방황하거나 좀 엇나가는 일탈 등을 하더라도 뭘 하고 있는지 항상 좀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어머님 덕분에 그래서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나고 또 한편으로는 저한테 이렇게 특별히 이렇게 잔소리하거나 이러지 않으셔서 그러니까 항상 생각해야 되고 또 남들한테 항상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살아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래서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런 말씀들이 떠오를 때가 많아서 요즘엔 항상 제가 이제 주변 지인들한테 많이 하는 얘기가 그러려니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려니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채)2002년에 처음 서울 오신 게 이제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 특구였다고 들었는데 그게 이제 아르바이트 대학을 가기 위한 아르바이트의 시작이었던 건가요?

▲(장)처음은 제가 대학을 갔던 것은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교였고요. 원래 이제 해양대 가서 마도로스가 돼서 돈을 많이 모아야겠다 집이 이제 어려우니 또 해양대가 학비도 싸거든요. 그래서 이제 저는 이제 전라도 사람인데 부산까지 가서 혈혈단신 얼마나 외롭고 그랬겠어요. 근데 또 거기서 좋은 친구들 너무 많이 만났어요. 부산 친구들 대구 친구들 또 해양대 친구들 많이 만나서 학교생활 재밌게 하다가 또 적성이 맞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러 가지 막노동도 하고 하면서 이제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렇게 다시 서울로 오려고 서울 신설동에서 학원을 다녔어요.

그때가 처음으로 서울에 와서 어찌 됐건 터전을 닦은 곳이 동대문구였고 그러다 보니 그 인접에 있는 학교였던 서울시립대라는 학교가 있는 것도 알게 되고 동대문구에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동대문구에서 터전을 닫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 수능을 보고 다시 대학 입시를 할 때도 저는 사립대 갈 생각은 못했고요. 그냥 이제 시립대를 가야겠다 학비를 벌어서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학교이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모교가 지역구에 있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감사한 것이 또 공공 교육이라는 게 매우 중요한 게 고졸로 끝날 수 있었던 제 머리 위에 학사모를 씌워준 학교거든요. 사립대 등록금이 한 350만원에서 400만원 정도 했으니까요. 아르바이트 해서 다닐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나마 한 120만 원 정도 했던 저렴한 시립대였기 때문에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 끼니라도 해결했죠.

-(채)정치를 대학 들어가신 다음에 시작을 하신 거잖아요. 이제 강금실 그 당시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신다든가 그리고 이제 총학생회장에서 출마를 하시면서 이제 여러 가지 길이 열리셨는데 그 어려운 알바를 굉장히 오래 하시면서도 그런 정치에 대한 꿈을 갖게 되신 계기가 뭘까요?

▲(장)제가 학자금 대출을 받으러 갔었는데요. 대학교 1학년 때 그때 이렇게 학자금 대출받다 보니까 그 당시에 부모님 이렇게 사인 받아오라고 하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니 제가 대학생이 학자금 대출을 받는데 왜 부모님 사인을 받으러 오라고 하는 거냐 막 따졌더니 이제 그 학생처 직원은 법과 제도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성인인데 이제 대학생인데라고 했더니 그 당시에 민법상 성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찌 됐건 신용대출이나 이런 부분에 대한 제한이 많아서 정말 그런 법과 제도는 바뀌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학생회 활동이나 시민단체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은 활동과 참여도 중요하지만 결국 정당 활동 정치로서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희 그 당시 이 열린우리당 활동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서울시장 선거에 내가 뭔가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서 그때 자원봉사자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활동을 했고요. 그 이후에 이제 그런 고민들이 잘 모여서 제가 나중에 총학생장이 됐을 때 서울시립대 시립대 반값 등록금을 저희가 제가 주장을 하면서 등록금 운동을 시작했죠. 학생회 하면서 네 그래서 이 대학생이 어찌 됐건 비경제활동 인구잖아요.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먼저 누군가가 국가가 나서서 등록금만 보전해주면 취업하고 나서 갚으면 되는데 소위 등록금 후불제에 대한 논의라든지 취업 후 상환 제도에 대한 논의가 그때 막 있을 땐데 조금 너무 저는 막막하더라고요. 조금만 누군가가 저에게 학비만 지원해줘도 제가 대학생인 기간만이라도 좀 누군가가 보호해 줬으면 좋겠는데 혹은 지원해 줬으면 좋겠는데 정말 기댈 곳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너무나 막막한 냉정한 현실에 맞닥뜨리면서 제가 그런 고민들을 많이 했죠.

-(채)총학생회장에 나가셔서 이제 반값 등록금을 이슈화할 때 고민이 더 되신 거군요. 반값 등록금 이슈가 커지면서 사실 대학생 정치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시게 된 거잖아요. 지금도 사실은 등록금이 높기 때문에 어려운 학생들이 많잖아요.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장)그래도 지금 이 소득분위 70% 이하까지는 이제 국가장학금 제도가 어느 정도 많이 확대가 돼서 지금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어찌 됐건 우리나라의 대학 등록금은 지나치게 높은 상황이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고등교육의 확대를 위해서 많은 사립학교 재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학교를 운영할 만한 역량이 안 되는 재단들, 또 재단이라고 하면 학교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재단 전입금이라고 해서 재단이 학생들의 교육에 지원을 해줘야 되는데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교수 임용이라든지 학생 선발 과정이라든지 그런 권한만 행사하려고 하는 재난들을 많이 봐서 좀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요. 재단도 어찌 됐건 교육 재단이라면 공공성을 좀 확대를 위해서 좀 사회적 책임을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와 더불어 국가도 좀 제대로 공부하고자 하는 또 괜찮은 대학 재단이라면 좀 지원도 확대할 수 있도록 좀 우리나라가 교육 내실화가 좀 더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채)보통 의원님을 볼 때 좀 어린 나이에 화려하게 좀 의원으로 데뷔하신 게 아닌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사실은 꽤 오랜 기간 동안 원외로 고생을 많이 하신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 원외 청년 정치인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좀 뭘까요?

▲(장)원외 청년 정치인으로서 청년 정치라는 건 별도의 다른 분야가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젊은 좀 빨리 시작한 정치인인 거죠. 그런데 9번의 공직당직 선거 중에서 제가 12년간 4번 연속 도전해서 떨어졌거든요. 그때 많은 분들이 보통 국회의원 하면 청와대 출신 고시 출신 장차관 출신 해외 유학파 출신 최소한 명문대 출신 이런 분류들이 있어요. 근데 저는 이 5가지 분류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12년간 4번 연속 다 떨어졌을 때는 이미 30대 중반 가량이 됐었고 다들 평가가 장경태는 끝났지 뭐 미래가 밝지 않은 청년 정도로 많이 인식도 됐고 그런 평가를 받았던 건 사실이고요. 그런데 제가 유일하게 장점이 초긍정주의자거든요.

그래서 12년에 4번 떨어지면 어때? 13년째 5번 도전하면 되지라는 마음이었어요. 또 도전을 하더라도 또 지나치게 허황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쉬운 도전도 할 필요 없고 적당하게 저의 또 제 장점 중에 하나가 제 주제 파악을 잘한다는 거에요. 자기 분수를 잘 안다는 점인데 적정하게 제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을 만한 도전들만 해왔어요. 사실 너무 큰 도전만 쫓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작은 도전에 안주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초긍정적 마인드로 또 적절하게 제가 자기 분수에 맞게 주제 파악하면서 도전을 해왔다는 게 아마 제가 잘 된 게 아닌가. 그 이후에 5번, 6번, 7번, 8번, 9번의 도전을 모두 다 다 성공했기 때문에 그 성공만 보신 분들은 역전승을 잘했네 골 득실이 좋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반전까지 다 다 보신 분들은 전반전에 얼마나 제가 죽을 썼었는지 잘 아실 거고요 그때 TV를 끄신 분들도 많죠. 그래서 후반전까지 잘 지켜보셨던 분들은 정말 막판 대역전극의 드라마를 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채)그런 어려움 때문이신지 사실 초선 때 청년 정치 사다리 3법이나 여러 이제 청년 정치에 대한 대안을 좀 제시해 주셨는데 지금 청년 원외에 있는 청년 정치인들은 무엇이 가장 좀 어렵다고 보세요

▲(장)여러 관련 입법들도 많이 했는데요. 제가 이제 21대 때는 이 청년 사다리법 위주로 많이 했습니다. 청년 정치 사다리, 일자리 사다리, 주거 사다리, 금융 사다리, 청소년 사다리 등등의 법들을 보육 사다리에 이르기까지 많이 했고 그중에서 이제 대표적으로 통과된 것들, 특히나 피선거권 연령 하향이라든지 만 25세에서 만 18세로 하향한다든지 정당 가입 연령을 만 18세에서 만 16세로 하향시킨다든지. 그동안 각 정당의 인재 육성을 위한 자금이 하나도 없었어요. 여성 정치 발전기금은 국고보조금의 10%를 배정하는데 제가 청년 정치 발전기금을 국고보조금의 5%를 확보하도록 그래서 지금 청년위원장 제가 할 때 예산에 비해서 지금 거의 20배를 쓰더라고요.

저는 한 1년에 한 6~7000만원 정도 썼었는데 지금은 10억원이 넘게 쓰더라고요. 그만큼 예산과 인프라가 대폭 확대되고 있는 과정이고 청년 공천 보조금이라고 해서 각 정당이 10%, 15% 혹은 20% 이상 공천을 하면 국고가 보조금이 나가도록 한다든지 제가 했던 1호 법안이 지방의원 후보자 후원회법이었고요. 또 이후에 지방의원 후원회법을 발의하고 지금 시행이 되고 있습니다. 통과가 돼서 국회의원은 후원회를 또 두고 후원회에 직원도 둘 수 있지만 지방의원 후원회가 금지되어 있었거든요. 저는 지역구의 크기만 다를 뿐이지 지방의원도 후원에 두고 또 후원에 지원을 둘 수 있도록 해야 된다. 똑같은 선출직 공자인데 그 차별을 하는 것 자체가 저는 그것 자체가 국회의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관련된 법을 많이 했는데 지금 원외 청년들은 사실 딱 직업 정치인으로서 살 수 있을 만한 길이 없어요. 국회 보좌진 아니면 아예 출마해서 지방의원이 되든지 저처럼 특고 노동자를 하면서 비정규직 장경태로 살면서 열심히 정말 월급 150~200만원 받아서 연명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이 직업 정치인의 유형들을 좀 확대해야 된다. 저는 지방의원 보좌진 제도도 실시됐으면 좋겠고요. 너무 이게 국회의원 보좌진 혹은 사무직 당직자 아니면 지방의원 아주 소수의 카르텔이에요. 지방 당직자도 중앙당 당직자 100명, 시도당 당직자 100명으로 TO가 딱 정해졌고요. 국회 보좌진도 국회의원 300명에 곱하기 9명이니까 2700명이라는 딱 이 상한이 있어요. 그래서 이 시장 자체의 진입이 아주 가로막혀 있고요.

지방의원은 당연히 기초의원 한 2700명에 광역의원 한 700여 명 750명 정도로 딱 선출직 공자도 수가 정해지고 그러다 보니까 인재를 육성할 만한 없어서 제가 입법조사처에 조사를 의뢰했던 게 하나가 뭐였냐면 아니 외교관을 키우는 과정도 국립외교원이 있고 또 예전에 과거에는 변호사 양성을 위해서 혹은 판검사와 변호사 양성을 위해서 사법연수원이 있듯이 저는 정무연수원을 만들어야 된다. 정치도 이제는 전문 영역이거든요. 정치가 무슨 인생 이모작하듯이 장 차관하고 고위 법관이나 검사장하고 나서 인생 이모작하듯이 들어오는 이 분야가 아니라 정말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정치적 리더십 트레이닝이 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그게 전문 분야 더 전문성이 강화되고 또 그 속에서 많은 또 인재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밟게 만드는 과정일 텐데 지금 뭔가 막 영입되고 이런 인연들이 너무 자격을 많이 해서요. 정치적인 성장보다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 정치연수원, 국립정치연수원 같은 데도 만들고 싶고 정무연수원 한 1년 정도 교육을 좀 해서 예전에 사법연수원처럼 3개월은 민주당에서 근무하고 3개월은 국민의힘에서 근무하고 3개월은 국회 사무처에서 근무하고 3개월은 중앙선관위에서도 근무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적 과정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구나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정치연수원 제도가 연수원 건립하는 게 또 목표 중에 하나 있습니다.

-(최)정치연수원 지금 말씀하셨으니까 제가 한번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국민 세금으로 해서 어떤 기관을 만드는 것보다는 각 정당별로 정치학계와 정치 학습장들을 좀 더 활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이런 또 생각을 하게 되네요.

▲(장)맞습니다

-(최)스웨덴 사민당에서도 제가 지금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정치학교가 지금 인상 깊었거든요.

▲(장)저는 사민당의 정치학교가 저도 인상 깊었어요. 제가 이제 서울시당위원장이다 보니까 어찌 됐든 간 자체적인 인사와 예산 집행 권한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이 정치학교를 혹은 정무연수원 제도를 좀 한번 만들어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러 공약 중에 하나가 크게 3개였거든요. 과거에는 광장에서 짱돌을 던졌다면 지금은 이 온라인 광장에서 온라인 짱돌을 던지는 시대라고 하면서 민주당 방송국 만드는 공약이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이제 당원 축제 당원 주권 시대에 맞는 당원 축제가 공약이 하나 있고 마지막 하나가 이 인재 육성 과정을 프로그램화해서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와서 한 네다섯 번 아카데미 하고 끝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식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좀 인재 육성 프로세스를 좀 최소 6개월 과정 정도 지금 실제 여러 대학교의 정치대학원 과정과도 연계할 수 있는 과정을 또 저희가 많이 고민하고 있거든요. 최고의 과정 AMP 과정처럼 만들어서 그래서 너무 이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도록 정치 연수생 과정을 좀 만들어볼까 그때 너무 영감이 깊어서 사민당의 청년 정치학교 과정이 너무 저는 인상 깊었고 그냥 말로만 듣는 거하고 또 직접 가서 본 거하고 다르잖아요. 그래서 차근차근 제가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어요.

▲(장)스웨덴에 오셨을 때 제가 기억 남는 게 본메시빅에서 우리 청년 두 사람 우리 자매님까지 포함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그다음에 춤을 췄던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그래서 아까 어렸을 때 춤과 그다음에 합창을 배웠다 하는데 저는 딱 머리에 떠오르는 게 그래서 그때 그 끼가 있었구나 지금도 기억 남는 그런 노래가 있어요.

▲(장)보통 가사를 제가 못 외워서 저희 세대가 이제 노래방 세대다 보니까 가사를 이렇게 보면서 부르긴 하는데요. 보면서 부를 수 있죠. 부끄럽네요. 되게

-(최) 앞으로 1절 외워가지고 한번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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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코, 한국 순이익 67% 미국 본사로 [서울=뉴스핌] 남라다 기자 = 미국계 창고형 할인점 코스트코가 한국에서 거둔 연간 순이익의 60% 이상을 배당금으로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코스트코 한국 법인인 코스트코코리아가 공시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는 이번 회계연도(2023년 9월∼2024년 8월) 영업이익이 2186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회계연도보다 16%가량 늘어난 수준이다. 미국 대형 유통 업체 코스트코 매장 앞에 생필품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이 대기 중이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같은 기간 매출은 6조5301억원으로 8%가량 증가했고 당기순이익은 58% 급증한 2240억원을 기록했다. 이번 회계연도 코스트코코리아의 배당금은 1500억원으로, 당기순이익의 67%에 이른다. 지난 회계연도에서도 코스트코코리아는 당기순이익(1416억원)을 뛰어넘는 2000억원(배당 성향 141.2%)의 배당금을 지급한 바 있다. 코스트코코리아는 미국 본사인 코스트코 홀세일 인터내셔널이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 인천, 경기 등 전국에 19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임직원 수는 7351명이다. 미국 본사가 챙기는 배당금은 1000억원이 넘지만, 정작 한국 기여도는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이번 회계연도 코스트코코리아의 기부액은 12억2000만원으로 지난 회계연도(11억8000만원)보다 3.5% 증가하는 데 그쳤다. 미국 본사가 가져갈 배당액의 1%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nrd@newspim.com  2024-11-1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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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임이라더니…김용만 김가네 회장 복귀 [서울=뉴스핌] 전미옥 기자 = 성범죄 혐의로 입건된 분식프랜차이즈 '김가네'의 김용만 회장이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됐다가 다시 복귀했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김용만 회장은 지난 8일 아들인 김정현 대표를 해임하고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김 회장의 아내인 박은희씨도 사내이사 등록이 말소됐다. 해당 내용은 지난 11일 등기가 완료됐다. 김가네 김용만 회장. [사진= 뉴스핌DB] 김 회장은 직원 성범죄 사건으로 인해 지난 3월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김정현씨가 대표이사를 지냈다. 그런데 최근 아들인 김 전 대표와 아내 박씨와 김 회장 간 경영권 분쟁이 촉발되면서 스스로 대표이사직에 다시 오른 것으로 관측된다. 김 회장은 김가네 지분 99%를 소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가네 관계자는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앞서 김용만 회장은 지난 7월 준강간치상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입건돼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또한 김 회장은 사내 경리 담당 직원을 통해 회사명의 계좌에서 수억 원 상당을 자신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계좌로 빼돌렸다는 횡령 의혹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은 김 회장과 이혼소송을 진행 중인 아내인 박 씨의 고발로 알려졌다. romeok@newspim.com 2024-11-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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