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연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74년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로 시작된 시리즈
허연 시선 '밤에 생긴 상처' 출간으로 맥 잇는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50년 전, 한국 시집 출판 역사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가 출간된 것이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시작으로 김춘수 '처용', 정현종 '고통의 축제',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강은교 '풀잎'까지 1차분 다섯 권의 시선집이 출간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집=팔리지 않는 책'이라는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눈에 띄는 대중성이나 자비 출판 형태가 아닌 이상 시집을 내는 데 10년 이상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고 신작 시집 출간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오늘의 시인총서 출간 50년을 맞아 시인 허연의 시인선이 출간됐다. [사진 = 민음사 제공] 2024.04.29 oks34@newspim.com |
1974년, 드디어 시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 포문을 '오늘의 시인 총서'가 열었다. 1번은 김수영이었다. 지금은 한국 시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지만 당시 김수영은 변변한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요절한 불운한 시인이었다. 젊은 평론가들이 선정한 오늘의 시인 총서 리스트는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해방 이전 등단 시인들이 가급적 배제된, 현대성에서 성취를 이룬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 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전설의 발간사로 기억되는 평론가 김현의 문장에는 젊은 시인의 직관적 언어를 선별해 한국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포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시인들만 조명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인'들은 '오들의 시 독자'를 낳았다. 지금은 시집 판형으로 자리잡은 세로형 디자인, 시인들의 대표작을 선별해 엮은 '시선집' 형태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문학적 사건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500원이었던 시집의 초판 2000부가 바로 매진돼 전 권이 재판에 돌입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거대한 뿌리'로 오늘의 시인총서 1번을 장식했던 시인 김수영. 2024.04.29 oks34@newspim.com |
그중에서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3년 동안 3만 부가 팔렸다. 한 마디로 기적이었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시인들의 인증 관문이자 문학 청춘들의 교과서였을 뿐만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앓는 이들이 훔치듯 읽던 영감의 보고였다. 자극을 필요로 하는 누구나가 이 시집을 읽으며 최전선의 한국어에 충격받았다. 오늘의 시인 총서와 함께 본격적인 '시 독자'의 시대가 열렸다.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마지막으로 22년 동안 운행을 멈췄던 시인 총서가 출간 50주년을 맞아 신작을 선보인다. 그 주인공은 허연이다. 허연은 청춘의 가치인 '불온함'을 인간의 실존적 가치로 노래하며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얻는 '여전히 젊은 시인'이다. 데뷔작 '불온한 검은 피'는 출간된 지 30년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3000부 이상 증쇄를 거듭하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 했다. '불온한 검은 피' 이후 13년 만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온다'는 드라마 속 테마 도서로, 소설 속 인용 문구로 등장하며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다.
그의 시선집 '밤에 생긴 상처'는 3개의 부로 구성되었다. 1부 제목은 들뜬 혈통, 2부 제목은 가시의 시간, 3부 제목은 신성과 세속이다. 1부에서는 세상의 옆구리를 찌르고 싶었던 젊은 나날의 방황을 서슬 퍼런 시어들로 만날 수 있다. 1부가 세상과 불화하는 불온함의 노래라면 2부에서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
속에서 빚어진 불온함의 내력을 보여 준다. 우울과 불안 같은 병증들이 문학적 언어로 그려지지 않던 시절, 허연의 시는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심리적 비명을 들려준다. 3부에서는 성과 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론적 모순이 영혼의 방황이자 영원한 방황을 그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 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자주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 있었다는 것뿐'―'이별의 서'에서.
민음사 시인총서가 만들어갈 새로운 시의 시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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