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와 '악의'보다 시급한 것은 도·감청 사실확인
한미동맹은 국익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서울=뉴스핌] 이영태 외교안보선임기자 = 용산 대통령실의 미국 정보기관 도·감청 의혹 옹호가 도를 넘었다.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15일 이달 말 한미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 뒤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 정부 도감·청 의혹'을 한미정상회담 의제로 다룰 계획은 없다며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신뢰 관계를 갖고 더욱 내실 있고 성과 있는 정상회담을 만들자는 의기투합이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1일 워싱턴DC 인근 덜레스 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입국하는 길에도 관련 질문에 "현재 이 문제는 많은 부분에 제3자가 개입돼 있으며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미국 측에 어떠한 입장을 전할 계획이냐는 질의에는 "할 게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 위조한 거니까"라며 "미국 국방부 입장도 있고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다. 많은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섣불리 얘기할 수 없다. 어제 제가 말씀드린 사실은 미국이 확인을 해줬고 어떤 것이 어떻다 하는 것은 우리도 시간을 갖고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고 부연했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실(NSC) 전략소통조정관 등 미국 당국자들이 한국 등 동맹국들의 동향을 도·감청한 논란에 대해 "이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국가안보적 파장을 조사하고 있다. 고위급 차원에서 관련 동맹국과 소통하고 있다"며 사실관계를 시인하고 조사를 진행중이라는 상황에서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고위당국자가 '위조'라고 단정짓고 '가해자의 악의는 없었다'며 사건 자체를 축소하는 데 급급한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 야당에서 (미국의) 보안 침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한국 대통령은 이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을까.
영국 가디언도 "(한국) 당국자들이 진위 여부가 불명확한 미국 유출 문건의 중요성을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는 26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과 한미동맹을 의식한 대통령실의 지나친 미국 옹호 행보는 정부와 여당 내에서조차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대통령실 청사 모습. 2022.06.10 mironj19@newspim.com |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이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자 "지금 미국 정부 관련 기관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면 한국과 공유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사실 확인이 이뤄지고 한미 간에 결과가 공유되면, 저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미측에 합당한 조치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소속 김홍걸 의원이 '어느 나라든 도청을 시도한다는 것은 국익과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느냐'고 묻자 "도청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여당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같은 날 외통위에서 "뉴욕타임스에서 미 국방 관리들이 문건의 내용이 대부분 진실이라고 했고 존 커비 전략소통조정관은 그 중 일부가 조작이라고 했다"며 "그런데 대통령실은 상당수가 위조라고 하고 있다. 그럼 상식적으로 어느 부분이 진실인지 밝혀야 하지 않나. 이런 판단이 있어야 하는데 대통령실의 발표를 보면 안타깝다"고 꼬집었다.
윤 의원은 "문건의 왜곡 여부가 아니고 불법 감청 여부가 중요한 것 아닌가. 미국이 불법 감청을 했는지 진상규명해야 하는데 대통령실은 감청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한다"며 "미국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실은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 관련 대통령실의 공식 입장>을 통해 "'미 정부의 도감청 의혹'에 대하여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의 상당 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며 "앞으로 굳건한 '한미 정보 동맹'을 통해 양국의 신뢰와 협력체계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아울러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 운용 중에 있다"면서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안보실 등이 산재해 있던 청와대 시절과 달리, 현재는 통합 보안시스템과 전담 인력을 통해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 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고 주장했다.
한국 등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도·감청 의혹은 이미 수차례 반복됐다. 한국이 포함된 건 발표된 것만 따져도 1976년, 2013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박정희 정권 시절 워싱턴포스트는 1976년 10월 15일 "박 대통령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고용해 미국 의회 의원들을 포섭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미 중앙정보국(CIA) 청와대 도청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2013년 6월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우방국을 대상으로 도청했다는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고발이 나왔다. 당시 10년 이상 휴대폰을 감청당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등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완전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즉각 항의했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그해 10월 예정됐던 미국 국빈방문을 취소했다. 각국 정상의 거센 반발에 오바마 대통령은 사과하고 동맹국 지도자들을 감청하지 않겠다는 공개 서약까지 해야 했다.
이번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CIA(중앙정보국) 등 여러 정보기관에서 취합한 국방부 기밀 문서가 유출됐다고 보도한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3월 1일 김성한 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나눈 NSC(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 대화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미국이 요청한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하는 방안을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출된 문건에는 1급 기밀과 매우 민감한 통신 감청을 의미하는 "TS(Top Secret)//SI-G(SI-Gamma)//OC(Originator Controlled)/NF(Not releasable to Foreign nationals)"라는 분류 코드가 적혀 있다.
한국의 혈맹이라는 미국의 도감청 의혹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도·감청이 이뤄졌는지 ▲이뤄졌다면 그 범위와 대상은 누구인지 ▲유출된 내용은 무엇인지 ▲도·감청의 결과로 한국의 국익이 손상되는 것은 아닌지 등이다.
즉 윤석열 정부가 가장 신경쓰고 보호해야 할 것은 미 바이든 행정부의 심기나 한미동맹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과 국익이다. 한미동맹은 한국의 국익을 최대화하고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실의 최근 행보를 보면 한미동맹과 미국 국빈방문이 마치 수단이 아니라 최종 목적지인 것처럼 행동한다.
용산 대통령실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동맹에게 도·감청을 당해놓고도 먼저 가해자가 악의로 한 것은 아니며 내용 역시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켜보며 10대 경제대국을 이끌어온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존심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국민들이 지불한 혈세는 값어치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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