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계 김재원의 회한 "지난 세월을 정리합니다"
박근혜 탄핵 주역 윤석열에 대한 복잡한 심경 피력
"이길 수만 있다면 괴물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떤가"
[서울=뉴스핌] 이준혁 정치부장(부국장) =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향후 행보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윤 전 총장의 동선을 알고 싶은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쳐서일까.
11일 윤 전 총장의 대리인으로 알려진 모변호사가 4월까지 공보업무를 맡을 사람은 없다는 문자까지 보냈다. 공보시스템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공보시스템은 정부부처에서나 쓰는 대언론 기능을 말한다. 선거기간 중에는 후보 캠프에서 쓰는 용어다. 아무 직책이나 직위가 없는 일반인이 쓸 용어가 아니다. 굳이 동선이나 동향을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리인이 있고, 그 대리인은 공보시스템 유무에 대해 언급했다.
윤 전 총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언론의 취재를 대응할 전담팀이 머지않아 꾸려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리인의 마지막 멘트도 흥미롭다.
"총장님의 유의미한 동정이나 계획이 있는 경우 기자님들이 모르시지 않도록 반드시 알려드릴 것을 약속 드릴테니 전화 좀 줄여주세요."오죽 전화가 많았으면 하소연까지 했을까. 아무튼 윤 전 총장에 대한 언론과 세간의 관심은 꼭지점을 찍고 있다. 그만큼 이슈 메이커다.
언론의 관심 뿐 아니라 당연히 정치권에서도 갑론을박이 뜨겁다. 야권에서도 논쟁이 불거지는 등 곳곳에서 찬반 정황이 보여진다.
친박(친박근혜)계로 잘 알려진 김재원 전 의원의 11일 페이스북 소회가 대표적이다.
평소 친분이 있던 김 의원은 기자에게 괴로운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고 전해왔다. 그는 그러면서 "이제 지난 세월을 마음으로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애달프게 했을까.김 전 의원은 2016년 11월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논의가 한창일 때, 탄핵을 주도했던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험난한 고개를 넘을 때는 악마의 손을 잡고도 넘는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과천=뉴스핌] 윤창빈 기자 = 윤석열 전 검찰총장 pangbin@newspim.com |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 탄핵 찬성 의원들과 연대해 박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가결시킬 것을 천명했다는 내용이다.김 전 의원은 연대 결과로 지옥문이 열렸고, 탄핵 직전 4개월 남짓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연고로 여러 곳에서 조사와 재판을 받으며 가족까지도 정신적 파탄에 내몰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특히 탄핵과 적폐몰이의 중심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있었다고 했다.김 전 의원은 요즘 하루 수백통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는다. 아직도 사기탄핵을 외치는 태극기 아저씨부터, 연령과 계층이 다양하다. "윤석열은 조국 추미애와 싸운 것 외에는 우파가 인정할 공이 없다", "공의를 위한 것이 아닌 출세를 위한 싸움이었을 뿐", "윤석열은 정대철·김한길·양정철의 조종을 받는 트로이 목마"라는 등의 정체성 논란까지 주장도 다양하다.
김 전 의원이 친박계 핵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보수우파 중에서도 더 오른쪽으로 가있는 적지 않은 수구세력이 이 같은 격정을 쏟아냈으리라 싶다. 그 중에서도 김 전 의원을 가장 괴롭게 하는 비판은 "보수우파가 아무리 급해도 피아는 분별해야 한다"는 비아냥이다.
이에 대한 김 전 의원의 답변은 예전의 그라면 하지 못할 말이다.
"차라리 윤석열이라도 안고 가서 이 정권을 끝내야지요", "박지원은 탄핵을 통과시키려고 악마의 손이라도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윤석열이 괴물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떻습니까. 윤석열이 악마로 보였을 수는 있지만, 그 악마의 손을 잡고 어둠을 헤쳐낼 희망이 보이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나는 윤석열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의 마침표를 찍었던 윤 전 총장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친박계 핵심으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 전 의원의 변절일까. 하지만 이는 변절도, 커밍아웃도 아니다. 예컨대 윤석열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정치인 윤석열은 거대한 물음표다. 어쩌면 많은 정치평론가들이 예측하듯 흰코끼리(귀하지만 효용가치는 없는 물건)로 끝날지도 모른다.
김 전 의원이 윤 전 총장에 대해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은 그만큼 보수가 무너져있다는 의미다. 실낱 같은 희망을 찾듯 대선 무대에 오를 후보군들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전 의원의 "그런 윤석열이라도 다행이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서울=뉴스핌DB] 김재원 전 의원(사진 왼쪽) alwaysame@newspim.com |
대선정국에 들아가면 알겠지만 정치는 간판이 아니다. 알맹이가 없으면 이보다 냉혹한 세계가 없다. 친박 김 전 의원이 '탄핵 중심' 윤석열이라도 희망을 보겠다고 하는 모습은 마치 5년 전 친노(친노무현)계를 보는 것 같다. 데자뷰 같은 느낌이다.
당시 유시민 임종석 등 친노계는 폐족이라는 멍에를 벗기 위해 여론의 공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돌파형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김 전 의원은 더 이상 친박계도, 박 전 대통령의 측근도 아니다. 어찌보면 폐족이다. 하지만 그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뼈를 깎고 살을 베어내는 심정을 토해냈다. 보수진영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지지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윤 전 총장에 대한 '물음표'는 부피를 늘려가는 중이다.
정치권의 현자라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같은 파평 윤씨로서 윤 전 총장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집안망신"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확고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일찌감치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토론 들어가면 1시간이면 끝날 인물"이라며 평가절하했다.
윤 전 총장이 바람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분수에 맞는 만큼만 운신의 폭을 가져갈 것인지 아직은 미지수다. 주변에 얼마나 정치세력을 모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벌써부터 보수진영 내에서조차 찬반 양론으로 내분양상까지 보이지 않는가. 이제 윤 전 총장이 물음표를 지워야 할 시간이 머지 않았다.
여론과 정치권은 그리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불 같은 기질의 윤 전 총장 또한 언제까지 서초동 자택에서 칩거하겠는가. 대선을 1년 앞둔 지금, 정치권이 윤석열 변수에 갈수록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어 흥미롭다.
jh3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