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숙혜의 월가 이야기
[뉴욕=뉴스핌] 황숙혜 특파원 = 글로벌 투자자들 사이에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엔화가 중동 정세 불안과 북한의 위협에도 상승 탄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달러화에 110엔 선을 뚫고 오르며 8개월래 최저치에 거래됐다.
엔화 [사진=블룸버그] |
투자자들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엔화가 과거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일본의 거시경제 구조와 금융업계 및 기업들의 자금 운용을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14일(현지시각) 달러/엔은 장중 한 때 0.3% 상승하며 110.22엔까지 뛰었다. 환율이 107~110엔의 박스를 뚫고 오른 셈이다. 이에 따라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지난해 5월 이후 최저치로 밀렸다.
이날 엔화 하락에는 미국의 중국 환율조작국 지정 해제가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단계 무역 합의안 서명을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의 온건한 움직임이 투자 심리를 고무시킨 한편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를 꺾어 놓았다는 분석이다.
MUFG 은행의 우치다 미노리 외환 전략가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환율조작국 지정 해제가 위안화를 끌어올린 한편 엔화를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른바 엔저(低) 현상은 중동 전운이 고조됐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해 벽두부터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 하에 이란을 공습,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피살하면서 무력 충돌 리스크가 번졌지만 엔화는 단기적으로 제한적인 상승을 보인 뒤 모멘텀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달러화에 대한 엔화의 등락폭 역시 크게 축소됐다. JP모간에 따르면 2019년 이후 엔화 등락 폭이 7.5%로 1980년 이후 최저 수준을 나타냈다. 연간 등락 폭이 10%에 못 미친 것은 1980년 이후 세 번째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금융업계 애널리스트는 엔화의 안전자산 입지가 좁혀진 데 대해 세 가지 배경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다. 이는 통화 가치를 압박하는 구조적인 요인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엔화가 중동 정세 불안에도 시장의 예상만큼 상승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일본 자산운용사들의 자금 운용도 엔화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금융업계는 상대적인 고수익률을 제공하는 해외 자산 매입에 잰걸음을 하고 있고, 이는 엔화를 끌어내리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아울러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 매입도 엔화 상승에 제동을 거는 요인으로 꼽힌다. 국내에서 자본 투자 기회를 찾기 힘든 기업들이 해외로 이탈하는 움직임은 추세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여기에 캐리 트레이드 역시 엔화의 상승 날개가 꺾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과거 일반적으로 트레이더들은 실물경기가 호조를 이룰 때 이른바 엔 캐리 트레이드를 동원해 브라질과 터키 등 고수익률을 제공하는 신흥국 자산을 매입했다.
그러다 거시경제와 금융시장 여건이 악화될 때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급격하게 위축됐고, 이는 경기 한파에 자연스럽게 엔화를 끌어올리며 안전자산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의 마이너스 금리 제도와 서브 제로 채권이 눈덩이로 불어난 데 따라 엔화의 캐리 트레이드 매력이 한풀 꺾인 상황이다.
유럽의 저금 여건으로 인해 엔화가 유로화에 비해 조달 통화로써 이점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지난해 미국과 중국의 1단계 무역 합의 서명 이전까지 침체 공포가 번졌을 때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면서 위험자산 '팔자'가 우세했을 때나 청산할 엔 캐리 물량 자체가 제한된 상황이 안전자산을 앞세운 엔화의 상승을 가로막았다는 설명이다.
higrac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