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별장이던 곳서 독립선언, 치욕의 역사 무효화 의미
민족대표 33인, 독립·자치 '청원' 아닌 독립 '선언' 결정
[편집자주]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은 이후 민족적 독립운동의 근본이 됐고 대한민국 건국의 원천이 됐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1 정신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유구히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고 식민 잔재는 여전히 곳곳에 스며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 선조들이 '못다부른 만세'는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서울=뉴스핌] 윤혜원 기자 =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입을 떼는 순간 결기가 느껴지는 독립선언문은 그날 태화관에서 세상에 공개됐다. 한동안 이완용 소유의 별장이었던 터라 총독부 관리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공간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것은 또다른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발화선이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1919년 3월1일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날 태화관의 하루를 민족대표들의 신문조서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다.
3.1독립선언서 보성사판. [사진=행정안전부 제공] |
◆선언서 배포부터 연행까지…긴박했던 3시간
민족대표 독립선언식은 오후 2시에 시작돼 5시쯤 끝났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태화관에는 당일 정오 무렵부터 민족대표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졌을 때 민족대표 33인 중 지방에 있는 기독교계 목사 4명(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 춘수)을 제외한 29명이 모두 모였다.
이즈음 강기덕 등 학생들이 태화관에 들어와 항의하는 소동이 빚어진다. 학생들은 거사 장소를 파고다공 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꾼 것에 항의하며 민족대표 중 한 두 명이라도 파고다공원에 와서 선언문을 낭독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체포된 민족대표 중 한 명인 신홍식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민족대표들은 "단지 선언서를 모든 사람에게 배부하면 그것이 곧 선언이 되기 때문에 굳이 공원에 갈 필요는 없다"며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학생들을 돌려보낸 민족대표들은 2시 정각에 선언문을 배포한다. 참석자들은 낭독을 생략하고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다.
사료에 따르면 태화관에서 선언문을 배포하던 즈음 민족대표들은 인력거꾼을 시켜 종로경찰서에 독립선언문을 보냈다. 자신들이 태화관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 작업을 마치고서야 민족대표들은 늦은 점심을 들었다.
점심식사를 하던 중 종로경찰서에서 경찰들이 달려왔다. 이에 민족대표 중 한용운이 일어나 간단한 기념사를 하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도 선언문 낭독이 없었던 것은 비슷한 이유였다. 당일 경무총감부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한용운은 "따로 (선언서의) 낭독은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용운 외에 신홍식, 이필주, 최린 등 다수의 민족대표들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민족대표들이 선언문을 일일이 검토했고 독립선언문을 이미 총독부에 전달했으므로 따로 낭독하지 않아도 된다고 봤던 것이다.
이와 관련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민족대표들의 진술이나 문헌 등을 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눈으로 읽었다고 나와 있다"며 "민족대표들이 상의해서 만들고 검토한 선언서를 대중이 모인 자리도 아니고 민족대표만 있는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낭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오후 3시쯤 민족대표들은 경찰이 가져온 자동차 한 대에 3명 내외로 나눠 타고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마지막으로 차에 오른 한용운과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도착한 건 오후 5시쯤이었다.
◆거사장소는 왜 태화관으로 바뀌었나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빌딩과 건물 앞에 놓인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비석. 태화빌딩 자리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이 열린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사진 = 김누리 기자] 2019.02.08. snfl0084@newspim.com |
민족대표 독립선언식이 치러진 태화관은 당초 물망에 올랐던 장소는 아니었다. 민족대표들은 2월20일 회의를 열고 '독립의 선언은 3월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거사를 하루 앞둔 2월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 사전모임에서 선언식 장소가 태화관으로 변경됐다. 그 이유는 민족대표 권병덕 등의 법원과 경찰 신문조서에 나타나 있다. 권병덕은 "이갑성이 말하기를, 그 일(3월1일 파고다공원 민족대표 독립선언문 발표)을 학생이 알고 있어서 다수가 집합할 모양이라고 말하니, 손병희가 학생은 난폭하기 쉬우므로 발표 장소를 변경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명월관 지점(태화관)에서 발표하기로 확정했다"고 진술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해 학생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이 열린 태화관은 어떤 곳일까. 태화관은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의 별관이었다. 조선 전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에 책록된 구수영과 조선 후기 안동 김씨 김흥근이 살았던 곳이다. 이후 헌종 후궁 경빈 김씨의 순화궁으로 이용되다가 일제강점기 이완용의 소유가 됐다. 1918년 이완용이 태화관을 팔려고 내놓자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했다.
한동안 이완용의 소유였던 태화관은 조선총독부 관리 등 친일파 인물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식이 열려 독립운동의 명소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태화관 자리에는 12층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고 건물 앞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비석만이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이완용이 을사늑약을 이토 히로부미와 공고했던 밀약의 장소, 음모의 장소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치욕의 역사를 무효화시킨다는 의미에서 태화관이란 장소가 선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종의 승하에 백성들은 왜 만세를 불렀나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고종 독살 사건이다 .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반쯤에 일제에 의해 독살됐다. 고종은 이날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돼 경련을 일으키며 붕어했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사후에 보니 고종의 혀와 치아가 타 없어졌다고 한다.
고종의 승하는 나라를 잃은 당시 백성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독립의지를 불을 지폈다. 따라서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인 3월3일은 운집하는 백성들의 소요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이었다. 다만 국장일은 예가 아니고 전날(2일)은 일요일인 점이 감안돼 1일로 날짜가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왜 백성들은 황제의 승하에 만세를 외쳤을까. 이에 대해서는 황사손 이원(이상협) 대한황실문화원 총재의 설명이 있다. "만세가 요즘이야 축하나 환호할 때 외치는 소리이지만, 그때만 해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경칭이었고, 죽음이란 단어를 꺼렸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대한독립만세'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만세(萬歲)는 환호하기 위해 두 손을 높이 들며 외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귀인, 특히 천자나 임금의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100년 전 울려퍼진 백성들의 만세 소리는 고종의 승하를 애탄함과 동시에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외침이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의 가치, 독립운동·해방의 단초로
전문가들은 태화관 독립선언식이 3·1운동과 함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분기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독립선언식과 독립선언문에 담긴 가치와 정신이 3·1운동으로 이어져 식민지배 탈피와 민주공화국 수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독립선언식과 독립선언문에서 '독립 선언'을 선포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며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계 내부에서는 '독립 청원'을 요구할지, '자치 청원'을 요구할지 등을 놓고 논란이 많았는데 이러한 논란을 종식하고 '독립 선언'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 정한 자리가 태화관 독립선언식"이라고 분석했다.
성주현 숭실대 교수는 "태화관 독립선언식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기본적인 틀이 제시됐다"며 "그날 민족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에 담긴 침략 거부, 독립 추구, 세계평화 열망 등의 핵심 키워드들은 3·1 운동을 비롯한 당대 독립운동들의 본질과 방향성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독립선언식을 통해 민주공화제의 역사가 시작됐다"며 "독립선언식은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독립국을 선언했고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과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고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 군주가 주권을 갖던 전제군주제였다면 독립선언식을 거친 후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치체계는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설명했다.
hwyoo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