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스핌]김근철 특파원=요즘 미국이나 한국 프로야구에선 ‘오프너 전략’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오프너 전략이란 선발 투수를 길게 끌고 가지 않고 초반에 교체한 뒤 불펜 투수를 중심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지난 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에선 탬파페이 레이스 등이 자주 쓰며 쏠쏠한 재미를 봤다. 밀워키 브루어스는 LA 다저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왼손 투수 웨이드 마일리를 선발 투수로 내보내 한 타자만 상대하게 한 뒤 오른손 투수로 교체하는 오프너 전략을 썼다.
좋게 말하면 새롭고 창조적인 대처 방법이고, 나쁘게 말하면 변칙 투수 운용일 수도 있다. 평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엇갈릴 수 있다.
최근 미국과 북한 사이엔 2차 정상회담과 비핵화 로드맵 등을 놓고 협상이 한창이다. 향후 북한은 물론 한반도 운명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담판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북미는 치열한 신경전과 심리전 등을 총동원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이상하게도 ‘오프너 전략’이 오버랩된다.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오프너 전략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그동안 틈만 나면 “비핵화만 하면 미국이 북한을 경제 부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 개발 카드가 북한을 비핵화로 이끌어내는 최상의 유인책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이후 북한의 풍요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직접 공개했다. 이 동영상은 북미회담에서도 그대로 사용됐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방송된 CBS 방송 '페이스 더 네이션'과의 인터뷰에서도 "김정은은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을 겪는 데 지쳤고, 그는 북한을 엄청난 '경제 대국'으로 만들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
김 위원장이 북한 경제 부흥을 최대 역점 사업으로 두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이미 신년사 등을 통해 북한은 물론 전 세계에 누차 공언해왔다. 하지만 ‘비핵화’ 조건과 ‘미국이 만들어 준다’는 결론에도 동의하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김 위원장은 미국을 경제 개발의 최종 파트너라가 아니라, 오프너로 활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핵 협상에서 일관되게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주장하며 실제로 이를 관철시켜 가고 있다.
한마디로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치를 쪼개서 단계별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이 보유한 핵, 즉 ‘과거의 핵’은 최종 단계 목록에 위치한다. 당연히 북미 간의 ‘단계적 비핵화’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려면 양국이 끝까지 성실하게 로드맵을 붙들고 종료해야만 한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경제 대국으로 이른 길의 파트너는 미국,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한 중국이 북한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으로선 향후 북한이 미국 주도의 경제권에 편입될 것을 반가워할 리 없다. 아니, 이를 용인하지도 않을 것 같다. ‘미국화된 북한’은 주한미군보다도 어쩌면 중국의 안보에 더 위협스런 존재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4차례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의 북중 정상회담의 일관된 주제가 양국 간 경제 협력이었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런데도 중국은 지금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거나 경제 협력을 진전시킬 수 없다.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도발 속에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엄격한 대북 제재에 중국도 동의해왔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무역 협상 압박 속에 서슬퍼런 미국의 독자적인 대북 제재도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이나 중국이 더 긴밀한 협력을 강화하려면 미국의 대북 제재의 빗장을 풀어 놓는 것이 당면 과제일 수 있다. 대북 제재의 전면 해제가 아니라, 물꼬만 터도 된다.
북한이 중국 등으로부터 경제 지원과 협력을 받을 수 있는 여건만 조성된다면 그 이후 북미 간 협상의 밑그림은 달라질 수 있다. 북한 입장에선 굳이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또는 한국 등의 지원을 앞세워 오히려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북한이 미국을 오프너로 활용하는 카드를 손에 넣게 되는 셈이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은 이미 미국을 오프너로 사용한 뒤 중국이 핵심 투수로 나서는 밑그림을 함께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북한의 경제 개발의 주도권이 미국이냐, 중국이냐가 아니다. 북한이 미국과 합의한 ‘9회말 완전한 비핵화’이란 로드맵에 매달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공식 매체들은 이미 앞으로 핵을 만들지도, 주변에 퍼뜨리지도 않겠다는 말만 강조할 뿐 과거에 만들어진 핵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않고 있다.
미국이나 한국 정부는 북한을 상대로 다양한 설득과 제안을 내놓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결단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성급하게 덤비면 북한의 ‘오프너 전략’을 부추기고 그 희생물도 될 수 있다. 이는 오히려 모처럼 찾아온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구축 기회를 무산시킬 수도 있다.
북한과 신뢰 구축과 평화 구축이 간절할수록 이를 위한 협상과 로드맵은 냉정해야 한다. 당장은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의 초석을 하나씩 두드리며 깔아가는 것이 오히려 비핵화 협상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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