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계 내 성폭력' 문제 2년 전부터 공론화 시도
비주류 하위 문화에 대중·언론 무관심
피해자들 "여성들도 편하게 공연 즐기는 인디계 원한다"
[뉴스핌=김준희 기자] # 인디밴드 드러머 A씨가 술자리에서 만난 나를 성폭행했다. 사귀자는 그의 고백에 거절했음에도 취한 나의 뒤를 밟아 집까지 따라 들어왔다. A씨는 이후에도 종종 집에 찾아와 성관계를 요구했다. A씨의 연락이 뜸해질 즈음 나와 비슷한 피해를 입은 다른 여성을 알게됐다.
# 인디밴드 남자 멤버 B씨는 남녀가 섞여 있던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강간물이 좋아"라며 당당히 자신의 포르노 취향을 밝혔다. 내가 뭐라고 하니 "뭐 어때 다 보는데"라며 당당히 얘기했고 함께 자리 했던 그 어떤 누구도 그의 발언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 여자친구가 있는 인디밴드 보컬 C씨는 15살 이상 어린 내게 "(같이) 자자"고 요구했다. 여자친구 있는 사람이랑 내가 왜 자냐고 하니 "너랑 자고 여자친구랑 어떻게 할지 결정하면 안돼"라고 묻더라. 거절했지만 어느새 그 사람 지인들에겐 내가 여자친구 있는 남자 꼬신 나쁜X이 돼 있었다.
지난 2016년 하반기, 미투 운동의 시초 격인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이 한창일 때 이 사례들은 '인디계 내 성폭력', '밴드계 내 성폭력' 문제로 폭로됐다. 피해자들은 아카이브(기록보관소)를 만들어 인디밴드계 내에서 일어났던 200여 건의 사건·사고들을 기록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다시 살아난 인디계 미투..반향은 2년 전과 마찬가지
반향은 크지 않았다. 인디밴드계 성폭력 문제로 논란이 됐던 인물들은 지금도 인디계의 중심에 있다. 2년 전 "음악에서 자궁냄새가 나면 듣기 싫어진다"는 말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인디밴드 보컬, 여성의 다리를 보고 "꼴린다"고 희롱했던 밴드 멤버 역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7년째 인디밴드 공연을 찾는 신모(22·여) 씨는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적은 비주류 문화계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다 묻힌다"며 "이걸 아는 인디계 사람들이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선후배가 똘똘 뭉쳐 문제를 함구한다"고 지적했다.
2년 전 잠시 불붙었다 사그라진 '인디계 미투' 운동은 다시 불씨를 키우는 중이다. 문화계를 비롯한 각계 각층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인디계에서도 최근 5차례 정도 미투 폭로가 이어졌다. 한 밴드 멤버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여성은 "저를 위해 또 제 주변의 모든 여성분들을 위해 용기를 내려고 한다"며 동참 취지를 밝혔다.
하지만 인디계 미투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반향은 2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투 동참자인 신모 씨는 "저만의 사고가 아니라 수많은 성범죄가 있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다들 멀쩡하게 페스티벌에 다니고 있다"며 "인디계에선 계속 문제였지만 대중 다수가 모르니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되고 악화된다"고 토로했다. 인디계 미투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적어 기사화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이 때문에 내부에선 '실명을 걸고 미투 운동에 동참해봤자 묻힐 것 같다', '씹힌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치부를 끄집어내기 싫다'는 반응도 있다.
◆음담패설이 인디계 문화?.."깨끗한 공연문화 만들자"
신 씨에 따르면 인디밴드계는 뮤지션과 관객 모두 남성이 다수인 '남초 사회'다. 이 때문에 음담패설이 오가기도 쉬운 분위기다. 신 씨 역시 남자친구와 함께 참석했던 사석 술자리에서 한 밴드 멤버로부터 "OOO(남자친구) 섹스하러 간다"는 얘기를 듣고 수치심을 느꼈다. 즉시 항의했지만 주변에선 '술 취해서 하는 말이니 이해하라'며 만류했다.
인디계 남성 뮤지션들은 무대 위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기 일쑤다. '인디계 내 성폭력' 사례집을 보면 남성 뮤지션들이 무대 위에서 "공연 보시고 여성분 만나 좋은 밤 보내고 가세요", "공연 끝나고 이성분들과 술 마시러 가세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공연 중간에 의미 없이 '섹스'를 외쳐 여성 팬들에게 불쾌감을 준 경우도 있었다.
인디계 특유의 뒤풀이 문화가 성폭력 문제를 키웠다는 분석도 있다. 신 씨 표현에 따르면 인디계는 뮤지션과 팬 사이에 '선'이 없다. 공연이 끝나면 뮤지션과 관객들이 어울려 뒤풀이 자리를 갖는다. 인디 공연 마니아 정모(27·여) 씨는 "자주 오는 관객에겐 뮤지션이 먼저 다가와 인사하고 뒤풀이를 권한다"며 "인간관계를 고려할 때 성범죄만을 우려해 뒤풀이를 원천 차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신 씨는 일종의 정신적 학대인 '가스라이팅'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신 씨는 "인디계 남자들은 '이게 여기 문화'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합리화한다"며 "여성들은 공연을 즐기러 발을 들였다가 성폭력 문화에도 '내가 이상한 건가' 검열하며 자신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여긴 원래 이런 곳이니까 싫으면 '네가 떠나라'는 식이다.
실제 인디계의 그릇된 공연문화에 실망한 여성팬들은 취미를 접고 떠났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실상을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며 '인디계 내 성폭력'은 2년 전이나 다름없이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신 씨는 '깨끗한 인디계'를 바랄 뿐이라고 강조했다. 신 씨는 "인디계가 이렇게 더러우니까 다 떠나라는 의미의 미투 운동이 아니다. 가해자들이 조금이라도 반성하길 바라고, 여성들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 환경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김준희 기자 (zuni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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