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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예술과 여자를 동시에 탐하다, 피카소

기사입력 : 2017년12월15일 12:30

최종수정 : 2017년12월15일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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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6)

현대 회화사에 있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사진의 등장'일 것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 동안 자연이란 대상을 시각화해낼 수 있는 특권적 권리를 누려왔던 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회화와 사진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사진에 맡기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확인코자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사진과는 다른 회화만의 별도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인상파시대를 지나면서 활동한 피카소는 이로부터 더 나아가 ‘큐비즘(Cubism, 입체파)’이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열어나가게 된다. 큐비즘이란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화풍을 말한다. 피카소는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콜라주(collage),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화면에 신문지· 우표· 벽지· 상표 등의 실물을 붙이는 기법이 파피에 콜레이며, 인쇄물· 천· 쇠붙이· 나무 조각· 모래· 나뭇잎 등을 붙이는 것은 콜라주이다. 이에 비해 아상블라주란 아예 화면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품을 한데 모아 구성한 미술품을 뜻한다.
이처럼 피카소의 주요 관심사는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 등이었다. 이런 그의 사고는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슷하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973)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그런 천재성의 일단은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그는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또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파리에 둥지를 틀게 된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모임에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흔히 ‘청색 시대(1901~1904)’, ‘장미 빛 시대(1905~1907)’, ‘원시 시대(1908~1909)’,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1908~1912)’,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1912~1913)’ 등으로 나뉜다.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장미 빛 시대에는 핑크색과 오렌지색의 색조가 두드러진다. 원시 시대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선구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이와 함께 피카소의 화풍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피카소는 초기 파리생활이 어려울 때 주로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특히 당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비극적인 자살은 그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연히 그의 화면은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색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그의 첫 여자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만나게 되면서 점차 짙은 우울에서 벗어나 장미 빛 시대를 열어나간다. 이즈음 그는 파리에서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들게 된다. 시인 아폴리네르, 화가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등도 포함되어 있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의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무차별 폭격으로 황폐화 된 게르니카 시가지의 참극을 듣고 분노해 그린 그림이 《게르니카(Guernica)》이다. 이 그림은 3.5m × 7.8m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캔버스에는 회색과 흰색의 색조만이 칠해졌는데, 이는 참사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속의 황소, 말, 백열전구, 믿기지 않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허둥대며 달리는 사람들, 꽃을 든 팔, 부서진 검 등은 전쟁의 공포와 참혹상을 송두리째 담고 있다.
피카소는 이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고 했으며, 프랑코가 죽고 1981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지금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별도 전시실에 전시되어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 이에 피카소는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게르니카, 캔버스에 유화, 349x77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이철환>

피카소처럼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다양하게 정열적으로 즐기고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 또 영향력까지 가졌던 예술가가 또 있을까?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하여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 4천여 점의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그림 중 1억 달러를 상회하는 것만 해도 《알제의 여인들》,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파이프를 든 소년》 등 3점이나 된다. 미술 경매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인 《알제의 여인들》이란 작품의 가격은 무려 1억 7,936만 달러였다. 그 어떤 화가들보다 압도적이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했다. 그 결과 20세기의 다른 모든 미술가들은 상대적으로 그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다. 피카소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실 고르키 등 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자유와 독창성을 사랑하고 또 표현해 내기를 갈망한 진정한 예술가이자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카소도 세월의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1973년 93세의 나이로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카소는 작품의 수만큼이나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23세 때 만난 첫 여인을 시작으로 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하였다. 7명의 여인들과 동거했고 2번 결혼했다. 후세의 평론가들은 피카소에게 있어 여인이란 존재는 예술 창조의 원천이었을 것으로 평가한다.
피카소의 나이 23세가 되던 1904년, 그는 파리에서 유부녀인 동갑내기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된다. 모델이었던 그녀는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인이었다.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육감적인 몸매와 검붉은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시절 ‘청색 시대’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 빛 시대’로 변신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07년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등을 돌린다. 자유를 갈망하던 피카소는 그녀의 깔끔함과 상류사회 지향의 기질에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카소는 1911년,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의 동거를 끝내고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이 여인은 피카소가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적 큐비즘을 버리고 격정과 선율에 가득 찬 종합적 큐비즘으로 들어설 때 인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에바는 1915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피카소의 세번째 여인인 올가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나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 장 콕토의 발레 《퍼레이드》에 무대미술을 맡은 피카소는 36살에 25살의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정식 결혼을 한다. 둘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낳는다. 그러나 올가가 피카소와 아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오히려 피카소와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는 파경을 맞는다.

1927년 피카소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그는 관능미 넘치는 17세 금발의 소녀 마리 테레즈를 6개월 동안 쫒아 다닌 끝에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운다. 그녀는 22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인 딸 마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녀가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며 버리고 떠난다. 피카소가 숨을 거둔 지 3년째, 피카소를 만난 지 50년이 되는 날, 그녀는 피카소를 저승에서도 보살펴야 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남은 불행한 여인이었다.
나이 54세가 되던 1936년 피카소는 29살의 사진작가이자 그의 다섯 번째 여인이 되는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피카소 작품에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피카소와의 이별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불행한 여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4년, 62세의 피카소는 20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류화가 프랑스와즈를 만나 함께 살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태양이나 꽃으로 표현된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하는 것을 알고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떠나게 된다. 자발적으로 피카소 곁을 떠난 유일한 여성이었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와 이별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이란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한 10년간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나이 72세가 되던 1953년, 피카소는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준 마지막 여인인 재클린이라는 이혼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8년간의 동거 이후 1961년 34살의 나이에 80세의 피카소와 결혼한다. 그리고 피카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한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헌신적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 피카소가 죽은 후 재클린은 방에 걸린 검은 커튼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또 피카소의 망령을 위해 식탁에 피카소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노래를 들려주거나 기이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 자살했고, 재클린은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앞두고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다. 또 피카소의 손자 중 한사람인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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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화랑담배] 제2회 광복군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호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식이었다. 미국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 4만원으로 조직한 군대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 된다.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고운기,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했다. 지대장은 지금의 사단장에 해당한다. 모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1940년 9월 17일부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일임을 선언합니다. 광복군은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조직입니다"라고 했다.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의 군맥(軍脈)과 군혼(軍魂)을 분명하게 잇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6단으로 편성하였다. 총 3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우선 지대를 만들고, 각 지대를 구대와 분대로 연계한 전투부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 1940년 9월 19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통보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원 명단'에 의하면, 부대 규모가 총사령부와 4개 단위부대, 여기에다 조선혁명군 부대까지 포함하여 5000여 명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12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에는 미국 측에 "미국이 제주도를 해방 시켜 주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긴 후,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로 미국 OSS 부대(지금의 CIA)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강도 높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주요 훈련은 3개월 기간에 고공낙하,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소리 없이 암살하는 방법), 통신(암호의 작성 및 해독법, 무전기 조작 및 수리), 교란 행동, 정보수집, 폭파 등 이었다. 일과는 07:00∼12:00 오전 훈련, 13:00∼18:00 오후 훈련, 19:00∼22:00 야간 훈련이었다. 주요 임무는 대한민국으로 낙하산과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미 공군 공습에 필요한 지형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탐지 및 파괴 지하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상륙작전 시 제2선에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국내진공작전 출정식을 개최했다. 개시일은 8월 10일이었다. 출정식 때 장준하 경기도 공작 반장은 "나는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입니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입니다. 발생인은 장준하, 결제인은 조국입니다"라는 유서까지 작성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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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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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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