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경전의 유무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삼천 삼사백 년쯤 전 그러니까 기원전 14 ~ 13 세기의 세계 풍경이다. 차축 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보다 대략 700 ~ 1200년 이전이다.
문명의 발생지 중의 하나이자 강력한 국가인 이집트는 그 무렵 람세스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의 시대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그 중 두가지가 인상 깊게 보인다.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다. 이집트에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이 모세의 지도 하에 탈출을 해 가나안으로 향한다. 히브리 즉 오늘날의 이스라엘이나 유대교, 천주교, 기독교의 신앙인들에겐 대단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모세나 출애굽 사건에 대해 그 정확한 시기나 해석엔 편차가 있지만 말이다.
또다른 하나는 카데시 전쟁이다. 이것은 이집트와 당시의 신생 강국인 히타이트와의 전쟁이다. 결과적으론 무승부로 끝나는데 만약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되었다면 당시의 오리엔트의 정치적 지형도가 달라지며 따라서 역사가 달라지게 된다. 이런 점은 남경태의 <종횡무진 서양사>에 잘 나와 있다.
이 두 사건 이후로 이집트는 쇠약의 길을 간다. 노예 민족이 탈출하더라도 저지하지 못한 점이나 신생 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점이 이미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시기는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의 오리엔트를 배경으로 의미 있는 전쟁이 두 개가 있었던 것이다.
둘 중에 카데시 전쟁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오리엔트에서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강국 간의 전쟁이며 트로이 전쟁의 당사자인 그리스나 트로이는 이에 비해 마이너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카데시 전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트로이 전쟁은 중요한 듯이 기억되고 있을까.
당시의 그리스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 이전에 크레타 문명이 있었긴 하나 에게 해의 자그마한 그 섬의 문명이 당시의 주변을 휘두른 것까진 아니었고 그 역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선진 문명들의 영향 하에 빚어진 것이었다. 크레타 문명을 무너뜨리며 생긴 미케네 즉 그리스는 해적질을 주로 하며 힘을 키우고 있었다. 트로이 점령과 약탈도 그런 일환이었다.
이처럼 카데시 전쟁보다 트로이 전쟁이 분명히 마이너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거꾸로 인지된 것은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사라져버렸고 그리스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 문명을 뿌리 중 하나로 삼아 유럽 문명에 이어 현대 문명이 있기 때문이다. 뻔한 말이지만 승자에 의한 역사 기술 방식의 결과이며 나쁘게 보자면 왜곡인 셈이다.
정리하자면 기원전 14 ~13 세기는 출애굽 사건으로 인해 히브리 민족이 부각되는 시점이자 그리스 문명이 발흥되는 시점이다. 전자는 헤브라이즘과 관계 되고 후자는 헬레니즘과 관계 된다. 그 둘 모두 유럽 문명의 근간이 된다. 물론 그것들의 뿌리를 파헤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이전으로부터의 영향력에 중점을 두는 연구들도 있다.
그리고 뿌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뿌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문명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뿌리를 부정함으로서 원천의 다양성을 꾀하는 경우도 있다.
그 모두에 열린 태도를 취하더라도 유럽 문명에 대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영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대했다. 그렇게 본다면 기원전 14 ~ 13 세기는 그 두 개가 발아하는 시점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닌 듯하다. 물론 헬레니즘은 시간이 한참 지나 마케도니아 시대에 열리지만 그리스 문명이 싹트는 시기와 결부시켜 본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페니키아 알파벳이 만들어진다. 그 이전에도 이집트의 상형 문자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 등이 있었으나 페니키아 알파벳은 한 차원 상승된 문자이다. 그것을 통해 당시의 해상 교류를 포함한 국제 교류가 왕성해진다. 게다가 페니키아 알파벳은 현대의 알파벳의 원형에 해당되는 만큼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오리엔트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그곳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기에 그걸로 기원전 14 ~ 13 세기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 시대를 세세히 볼 수만 있다면 필자의 이런 그림보다 훨씬 다양하며 놀라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그림은 필자뿐 아니라 현대 지식의 한계일 수도 있고 또 당대의 모든 것이 액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 유의미성이 아주 크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그런 관점을 기본으로 깔고 눈을 돌려 동북아를 보자. 중국 위주로 본다면 당시는 은나라 시대였다.
동북아 역사에서 은나라 이전의 시대는 보통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은 이전의 하 왕조를 포함해 그 이전의 세계를 역사로 인정하는 연구도 되고 있고 동이족 위주 내지 동이족과 결부된 연구 역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어떤 경우든 동북아의 기원전 14 ~ 13 세기 역시 중요한데 은허를 통해 보듯 체계적인 나라 형태를 띤 흔적이 보이고 갑골문이라는 문자도 등장한다.
오리엔트, 지중해, 동북아 이외에도 당시의 지구의 곳곳에 복잡하고 기묘한 꿈틀거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두를 탐사하려는 취지의 글이 아니기에 현대 문명에 중요한 양대 축인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기원전 14 ~ 13 세기는 어떤 의미로 보다 와닿을까.
앞 선 수필에서 차축 시대가 현대 문명의 바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썼다. 그 논지는 거의 자명하기에 쉽사리 무시당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기원전 14 ~ 13 세기를 재조명한다면 우선 트로이 전쟁을 들 수 있겠다.
서양 고전의 시작인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는 모두 그 전쟁을 무대로 해서 쓴 것이다. 살펴봤듯이 침소봉대나 왜곡의 논리도 가능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당시의 인류를 볼 수 있는 많지 않은 고전 중의 하나임엔 틀림 없다. 일리어드와 오딧세이가 쓰여진 시기는 기원전 8 세기 경이지만 그 기원은 이렇듯 그 시기와 맞물려 있다. 오리엔트에서 지중해로 주도권이 옮겨지는 시점에서의 허접한 전쟁이 서양 고전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서양 고전의 출발이 이런 반면에 동양의 경전은 어떠할까.
경전의 대표로서 주역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주역이야말로 사서삼경 중에서도 으뜸 가는 것으로 쳐지곤 한다. 주나라 때 지은 역이라 해서 주역인데 그 연원은 거슬러 올라간다. 은나라 시대에도 은역이라고 해서 전승되진 않지만 존재했었다고 한다. 그러니 서구에서 고전이 시작되기 이전에 동양에선 이미 경전의 씨앗이 생겨난 것이다. 그 씨앗은 한참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팔괘를 그었다는 복희 시대인 기원전 2900년 경까지 간다.
이처럼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중요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내가 보는 고전과 경전도 그 시절에 적어도 씨앗들이 품어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시기에 오리엔트, 지중해, 동북아에 공히 왕성해지는 문자의 위력은 문명의 바퀴를 한껏 강하게 돌리는 기반이 된다. 그 힘은 문화의 저변에 점점 쌓여 700 ~ 1200 년 정도 후에 고전과 경전, 깨달음의 세계에서 강렬하게 나타난다. 이렇듯 다양한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보이는 기원전 14 ~ 13 세기를 나는 차축 시대의 여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현대 문명은 야스퍼스가 말한 차축 시대의 영향이 지대한 것이 사실이다. 그 차축 시대는 그 이전인 기원전 14 ~ 13 세기의 여명에 이어 대대적으로 터져 나온 밝음의 시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명훈(소설 ‘작약도’ 저자)